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수요기도회-이방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박승남 2020-03-11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171

http://areumdaun.net/bbs/bbsView/34/5703223

[성경본문] 사도행전15:1-21절 개역개정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수요기도회 입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기도
성경읽기 행15:1~21 괴롭게 하지 말고(설교내용은 아래에)
헙심기도  말씀을 붙들고, 코로나에 휩싸인 나라와 민족, 한국교회와 선교사님들, 우리 교회와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밴드와 홈피에 올린 다니엘 기도회 여러 기도제목을 보시고 기도하시면 좋습니다)
천송 370장 (바꾸어도 됩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15:1~21 이방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사회학의 초대]라는 유명한 저서에서 개종이란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방향을 수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급격하게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서서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신 신자들을 크게 유대인 신자들과 비유대인 다시 말해서 이방인 신자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연장선상 (延長線上)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줄기차게 약속하신 구세주, 즉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유대인들은 어렵지 않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피 흘리는 제사를 제외하고는 이전과 똑같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사회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를 낳으면 율법의 규정에 따라 8일 만에 할례를 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율법의 규정에 따라 조리하였고 음식을 먹을 때도 율법의 규정에 따라 먹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성전에 바쳐 레위인들의 양식에 보탬이 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겉으로 볼 때는 성전에서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 뿐 이전의 생활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들을 섬기던 이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신을 섬겼는지 어떤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17:23)라는 문구가 적혀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잡신들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개념을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야를 헬라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이방세계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었습니다. ‘크레스토스라는 유명한 노예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크리스토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방인들로서는 모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얼른 다가오지 않는 말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보다 예수는 주시다라는 말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는 헬라어로 큐리오스라고 하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다른 신들을 부를 때도 사용하던 명칭이었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보다 영생이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불멸의 개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방인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여러 문화적인 장벽 때문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문화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이방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 라틴 문화들을 두루 섭력한 바울 같은 인물이 적합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 이방인 교회로 데리고 와서 동역하였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이방인 교회에서 수많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였습니다. 잡신들을 섬기던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그들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어떤 유대인 신자들이 안디옥 이방인 교회로 내려왔습니다. 신자들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이 보낸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스스로 와서 자신들의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가진 이방인 초신 자들에게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절에는 이처럼 단 한 줄로 그들의 주장이 적혀있지만, 그들이 자기 이론들을 펴느라고 얼마나 많은 말들을 했겠습니까? 구약 성경에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구절이 무수하게 적혀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 거기에 맞설 수 있는 이방인 초신자들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초신자들은 바울에게서 잘못 배웠나 의심이 생기고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면서 혼란 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이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면 차라리 신앙생활을 포기하겠다고 마음먹는 초신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처음 신앙을 가지려고 할 때 여기저기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혼란 가운데 빠지기도 합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것이 진리인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또 그것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주장에 시달리다가 결국 지쳐서 신앙을 갖는 일을 포기하는 수도 있고 이단, 사이비에 빠지는 예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결국, 이 일 때문에 2절과 같이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여러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교회에서 바리새파 신자들이 일어나 바울과 바나바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면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와 장로들이 그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많은 변론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변론 내용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할례를 비롯한 율법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모르던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규정들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방인 신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그 외 많은 변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초대교회는 목회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의견이 하나님의 지시처럼 시행되는 교회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내어놓으며 많은 변론을 거친 후에 방향을 정하는 교회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론 토론을 싫어합니다. 그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들이 부딪히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의견을 내는 이들을 조직의 반역자 정도로 취급합니다. 특히 유교 전통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의 조직체가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많은 변론, 토론은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하고 생각하도록 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충분한 검토가 없이 한 사람의 의견을 주심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리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과학용어 중에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홍콩에서 나비가 날갯짓했는데 그 공기의 흐림이 미국 뉴욕에 이르면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방향을 조금 잘못 잡은 것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항상 실수하고 잘못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분명 옳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보면 내가 틀리고 또한 그것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주장, 내 의견만을 내 세우면 안 됩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 의견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많은 변론을 통해 서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최대한 줄여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결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요지는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분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할례나 율법을 통하지 않고도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로 말미암아 이방인 가운데서 행하신 표적들과 기사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그 점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그들이 말을 마치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일어나서 종합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럴 때도 19절에서처럼 내 의견에는이라고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종합적인 결론에 해당하는 야고보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도 잘 지키지 못하는 율법의 규정들을 이방인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율법의 규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할례인데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으면 다른 규정들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사실 이것도 이방인 신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경계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굳이 아고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살고 있는 이방 사회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우상에게 바친 날고기들을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제사 고기들을 즐겨먹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런 음식들은 삼가도록 하여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원만한 교제를 나루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음행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성적쾌락이나 간음을 의미하는 것과 나아가 근친상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 당시 이방 사회는 음행을 그리 큰 잘못으로 여기지 않았고 나아가 근친상간에 대하여 별로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반 음행은 물론이지만 이러한 근친상간을 멀리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만 주의하고 그 나머지는 각자 신앙 양심에 따라 행하면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이방인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한 결정입니다. 이러한 결정을 힘입어 바울은 갈라디아 5장에서 담대하게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1~4)

구약에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진다고 하였는데 바울은 이방인 신자가 할례를 받으면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이 단순히 어느 부분의 살점을 떼어낸다고 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는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경계하고 있는 것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율법적인 의식입니다.

물론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아가 십일조를 내고 안 내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동반되는 믿음, 사랑의 마음과 더불어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을 위해 효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이었을 지라도 세례요한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었기에 십일조를 열심히 낸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할례나 십일조 같은 차원을 뛰어넘습니다. 십일조가 아니라 어떤 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십의 9조까지 드린 이도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미국의 체신부 장관을 지냈고 백화점 왕이라 불리었던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입니다. 신문 기자가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투자할 때마다 늘 성공하는데 당신의 생애에서 어떤 투자가 가장 성공적인 투자였습니까?" 그러자 웨너메이커는 "열두 살 때 투자한 250센트가 생애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그때 250센트를 주고 성경을 샀는데 그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순종하며 살았더니 이런 복과 은혜가 주어졌다는 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십일조의 시작은 율법 있기 전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14:20, 7:4)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14:18, 110:4, 7).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 믿음에 근거한 헌금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믿음과 사랑을 가진 자가 기쁨으로 바친 것이 십일조입니다. 그런 십일조가 유대교에서 사랑이 없는 율법의 행위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일조는 내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증표이며 인간들의 빚어내고 있는 불공정 사회를 공정사회로 바꾸기 위한 장치입니다. 정의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고난 겪는 사람들,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십일조의 참 정신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이들 중에는 땅을 유산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과 제사장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의와 공의와 긍휼, 믿음이 상실된 형식적, 종교적인 십일조는 주님이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밭을 팔아 전부 드린 경우도 많았습니다. 물론 억지로나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믿음으로 바친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을 때는 어떤 율법의 송사도 이겨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 다시 말해서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내린 결정도 결국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가 율법 덩어리로 어겨질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율법적인 무거운 짐을 신자들에게 지우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상대방의 신앙을 돕기 위한 권면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율법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권면하는 자나 받는 자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질 때 율법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원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서 자신을 살피고 율법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서 많은 변론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20311일 수요기도회 설교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가족상봉과 구별된 고센 땅 박승남 2020.03.14 0 1366
다음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된 가정 사진 박승남 2020.03.07 0 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