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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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송 받은 공직자 박승남 2020-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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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7:13-26절 개역개정

13.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15.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 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16.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17.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18.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19.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20.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21. 요셉이 애굽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겼으나

22. 제사장들의 토지는 사지 아니하였으니 제사장들은 바로에게서 녹을 받음이라 바로가 주는 녹을 먹으므로 그들이 토지를 팔지 않음이었더라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7:13~26 칭송받은 공직자

 

199712월 우리나라가 IMF 체제로 들어갔을 때, 고위 경제 관료들은 밤 12시 전에 퇴근한 일이 별로 없다고 하는데요,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기가 가진 전문 지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그 난국을 타개하려고 그만큼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신종 코로나로 인하여 당국자들이 얼마나 고민과 수고를 많이 할까요! 우리 교단 예능교회 안수집사인 정세균 총리가 코로나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3주째 대구에서 머물면서 현장을 살폈고 서울 정부청사로 복귀해 일하고 있습니다. 단지 전염병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위기 나아가 정치 교육 외교 모든 문제에 걸쳐 있기에 그야말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방역 당국자들은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엄청난 흉년을 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요셉 당시 이집트가 당한 흉년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당시 애굽은 빈부 귀천을 막론 하고 백성들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엄청난 위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돈과 보석이 있고 좋은 집에 살면 무엇합니까? 먹을 것이 없는데~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위기가 잘 극복됩니다. 어떻게요? 성령에 감동된 요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한 요셉의 역할 속에는 엄청난 노력과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풍년 때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전국에 있는 곡식을 공평하게 거두어들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보관하고 잘 분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위하여 관리를 뽑고, 훈련하고, 그들을 지시하고, 감독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또한,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던 백성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면서 세운 정책을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백성들과의 마찰과 갈등이 있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작업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백성들이 곡식을 얻기 위하여 돈을 주고 사는 일, 또 짐승을 다 주고 곡식을 바꾸는 일, 그리고 자기들의 밭과 논을 다 나라에 헌납하고 곡식을 얻어가는 과정들이 간단하게 기록되었지만, 이것은 백성과 정부와의 상당한 갈등 과정을 암시하고 있고, 이것을 거쳐 가면서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는 요셉의 능력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1절을 보면 요셉은 이집트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여러 성읍으로 나누고, 이집트 전 지역에 사는 백성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 국토 종합 개발을 위해서 애굽 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백성을 성읍들에 옮깁니다. 균형 발전을 위해서 주민 이주 정책을 추진했고(물론 목축을 하는 고센의 가족은 제외), 또한 24절에 보면 세제를 개혁했는데 토지 수확의 5분의 1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게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20%를 세금으로 내라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면 아, 이 세금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고대 기록을 보면 1/3 그리고 많게는 절반까지 세금으로 거두어 들였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그 옛날에 20% 세금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파격적입니다. 그뿐입니까? 26절입니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토지법을 세워서 수백 년간 애굽 법의 모체가 되는 중요한 법으로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돈을 거두고, 짐승을 모두 다 사들이고, 땅을 다 사들이는 이러한 과정. 이거 폭정이 아닌가요? 그런데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 모두가 요셉이 행한 일에 감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폭정이 아니라 엄청난 선정입니다. 요셉은 칭송받은 공직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생각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나는 내가 맡은 일을 누구보다도 잘 감당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정말로 노력하고 있는가, 그래서 더욱 전문가로 성장해 가고 있는가, 그렇게 인정받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환경, 노동, 건축, 예술, 농업, 사회복지, 의학, 법률, 교육, 경제, 체육 등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야를 대변하고 입법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도 각자의 전문성을 늘려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여준 것이 전문성입니다.

 

두 번째는 정직성입니다. 요셉이 맡은 자리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아주 요직 중의 요직이요, 노른자 중의 노른자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이권이 개입될 수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 곡식을 팔고 돈이란 돈을 싹 모았습니다. 엄청난 돈이지요. 그러면 여러분 같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견물생심이라고 일부를 취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는 대부분 사람이 갖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실 얼마를 손댄다고 해도 티도 안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거 가지고 한 푼이라도 떼어먹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어디로 가져갑니까? 바로의 궁정으로 가지고 갔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20절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이게 바치니 이집트의 모든 사람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땅이란 땅 다 사들였어요. 그러나 한 평도 자기 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로의 것이 되었다고 두 번 강조합니다. 깨끗하고 정직하게 일합니다. 이권이나 명예를 위해서 정직을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는 신뢰를 받습니다. 왕에게서, 그리고 백성들이 그의 공평과 정직에 대하여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이것이 정직성입니다.

시51편을 보면 다윗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정직이란 무엇입니까? 바르고 곧은 것입니다. 마음이 곧고 바른, 바로 잡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어로 보면 세우다 확정하다 등입니다. 보십시오. 시57편 7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 확정되다는 말과 정직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동일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마음을 확실히 정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마음을 세워주시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생명의 구원을 위해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요셉은 마음이 확실히 정해진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을 일이 많았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회의원들이 정직하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탄핵당한 이유는 도청이 아니라 거짓말이었습니다이번에 등록한 국회의원 후보자를 보면 최근 5년간 각종 세금 체납 경력이 있는 후보는 13.4%(121)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음주운전, 폭행, 증권거래법 위반 등의 범죄 경력이 있는 후보는 물론 사기죄로 벌금을 낸 후보조차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직 후보로서 기본적 자질을 갖추지 못한 후보자가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국회로 가서 정직하게 국민을 대변할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들을 국민이 표로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말할 때 사실, 진실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실하신 예수님은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은 거짓을 말하면 안 됩니다. 더욱이 신천지처럼 자기의 목적을 위해 거짓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충성심입니다. 요셉은 그를 믿고 일을 맡겨 준 바로에게 끝까지 충성합니다. 바로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의 권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항상 묻습니다. 23절 보세요.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오직 바로를 위해 일합니다. 자기 가족을 고센 땅에 옮겨 놓고서 제 맘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11절에 보시면, 바로의 명대로 고센 땅에 거하도록 자기 가족을 조치합니다. 철저히 맡겨주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제사장의 토지는 결코 사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바로 왕이 그것을 위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셉은 자기에게 맡겨준 일은 철저하게 감당하면서 맡겨주지 않은 일은 월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충성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충성심은 빼놓을 수 없는 미덕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를 위해 일했다는 것은 공직자로서 사심 없이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는 잘하는데 일 한 번 시켜 놓으면 믿을 수가 없다, 감당치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또 정직하지도 않고 슬슬 못된 일을 잘하고 그뿐 아니라 충성심도 없이 언제나 비방하고 다니고, 권위에 불순종하고, 그러면서 "주여, 하나님!" 되겠습니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도들이 나가서 이 세 가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일한 결과, 어려운 일을 만나기 전보다 이 위기가 끝났을 때 나라는 더욱 부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은 최고로 권위 있는 왕으로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굳힙니다. 그럼, 나라 부강 시키고, 자기 고용한 왕은 영광을 다 받게 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없어졌는가요?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어른께서 우리의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어른께서 우리를 어여삐 보시면, 우리는 기꺼이 바로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의 정직한 수고와 헌신과 노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의 가치는 찬란히 빛나고,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난국을 다 타개하고, 최고의 치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사실 바로도, 바로의 신하도, 그 백성들도, 요셉도 똑같은 풍년과 똑같은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바라보고 믿고 행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책을 돈 버는 도구로, 자기의 명예를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 일 속에 나를 향해 하나님께 주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일이란 많은 사람을 위한 봉사요, 은혜를 베푸는 도구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해서 진정한 일이란 한 마디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섬기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잘 섬길 때 소득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바르게 하고, 제대로 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을 살리고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냐?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지금 필요하냐? 요셉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다 있는 곳에서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총선에서는 누구를 찍고 누구를 피할까요?

시편 15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 누가 주님 계신 곳에서 살 수 있는 사람입니까? 주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사람은 누굽니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사람, 혀를 놀려 남의 허물 들추지 않는 사람,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친구를 모욕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자는 경멸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하면서,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않으며, 무죄한 사람을 해칠세라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3천 년 전 다윗 때나 지금이나 사람 찾는 기준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실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변화, 인구의 감소, 청년 실업의 증가, 계층과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몇 년째 자살 공화국이라는 불명예의 딱지는 떨어질 줄 모릅니다. 거기다 임박한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위기로 인해 자욱한 미세먼지 속 괴질의 번창으로 대한민국은 지금 근본적이고 심각한 위기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뼈아프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교회는 지금 어떤 세상을 꿈꾸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의 성장이나 개인의 복 받는 것만을 꿈꾸며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꿈들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 한 개인의 복에만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배타적 성격 때문에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 교회만의 번영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편이 아닌 다른 쪽은 우리의 경쟁자가 되고 우리의 적이 되어 그들을 혐오하고 저주하게 될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입니다.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삶의 틀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이고 더욱 치열해지게 마련입니다. 적당한 보완책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정글의 짐승들이 되어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잡아먹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시장 자본주의는 결국 승자독식의 사회를 만들고 약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교회는 어떤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까?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사람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고 있는 희망가의 이 가사는 바로 우리 교회를 향한 시대의 물음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를 향해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꿈꾸고 있으며 어떤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인가?” “자기들만 천당 가고 잘살자는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을 얻기를 바란다면 요셉에게, 아니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상을 원하셨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로마의 식민지배와 헤롯 왕의 학정,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당시의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참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며 어떤 세상을 꿈꾸셨을까요? 주님은 자신이 사시던 당시의 시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통 바치신 분이십니다. 세월이 지나 교회도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주님께서 꿈꾸셨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 일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어떤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을까요? 정말 솔직하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얼어붙게 하고 공포와 혐오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병들게 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우리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이 사회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과 탐욕, 거짓과 혐오와 불안이라는 바이러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정치가들과 언론의 선동에 놀아나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만이 옳은 줄로 알고 망상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향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회는 갈가리 찢어지고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십자가에 못을 박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폭력적으로 되어 갑니다. 교회의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군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고 저주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틈을 타고 사이비 종교는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숙주로 더욱 창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오늘 한국사회의 광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습니다. 아 참 서글프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병든 이 사회를 치유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국교회는 상대방에 대한 모든 저주를 그치고 분노와 폭력의 언어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세상의 생명을 품어 안으시고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해를 비추시며 골고루 비를 내려주시는 자비와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앞으로 성 금요일의 수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 새로운 부활의 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의 문을 열어 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활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고난과 사랑의 희생과 그리고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밤이 깊을수록 우리는 부활의 새벽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신앙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은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과 두려움 속에 이미 잉태되고 있으며,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동터오는 새벽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우리 민족은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일치단결하여 국난을 극복해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19사태도 함께 힘을 모아 슬기롭게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다가올 후폭풍입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그야말로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진저리나는 정치세력들의 편 가르기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정책, 비전을 갖고 하면 좋은데 그것이 아닌 상대 후보의 약점, 허물을 물어뜯고 비방하고 대신 자신은 잘난 사람, 괜찮은 사람, 훌륭한 인물이라고 포장하고 홍보하는 그런 모습을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결국 국민은 또다시 분열되고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혼란의 중심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당면한 어려움을 헤치고 새로운 내일을 담아낼 수 있는 개혁적인 국회입니다. 그러나 20대 국회를 통해 우리가 본 것은 지겨운 편 가르기 싸움으로 퇴행해 가는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국회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우리는 골치 아픈 국회를 십자가 지듯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아니라 상생과 포용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그래서 칭송받을 공직자를 한사람이라도 더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절망적인 시대의 한가운데서 희망가를 부르며 희망이 어디 있느냐?”고 눈물짓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교회가 그들에게 희망을 말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혐오와 저주의 언어를 버리고 용기 있게 평화와 상생의 말씀을, 부활과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소란하고 혼란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싹트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생명의 움직임을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애굽 사람들이 요셉에게 했다면 우리는 주님께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를 위해, 그 백성들을 위해 일했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우리 주인이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나라는 배제와 혐오의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나를 품어주시는 경계 없는 평화와 상생의 세상, 사람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주님의 종된 우리는 모두 함께 그 나라를 꿈꾸며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20203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오늘 설교는 대한성공회 원로이신 박경조 주교의 설교문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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