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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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박승남 20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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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7:35-53절 개역개정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7:35~53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000년 묵은 종려나무 씨앗이 새싹을 틔우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고 2005612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했습니다. 이 씨앗은 1970년 이스라엘 마사다 성채 발굴현장 지하 34M 지점에서 나왔습니다. 마사다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은 유대인 960명이 최후까지 항전하다 주전 73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유명한 성채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앗 3개를 얻은 중동 식물 전문가 엘레인 솔로위는 이 중 한 개를 화분에 옮겨 심었고 6주일 뒤 길이 30cm, 7개의 새싹으로 길러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씨앗에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성전에도 종려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하신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성전을 보면 문과 뜰, 그리고 지성소와 제사장들의 방들이 있는데 문마다 종려나무를 그려 넣었습니다. 또 그룹의 모양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종려나무는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 예루살렘에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려나무 잎사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로 불리는 대추야자는 생명과 평화, 아름다움과 승리, 정의로움과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성전 각 문에 종려나무를 그려 넣으신 것은 주님이 만드신 성전은 영원하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며 풍성한 양식을 먹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종려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백성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자랑스럽게 입성하셨습니다. 너도나도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옷을 벗어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시에 찬양하리로다 우리의 임금 예수!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뿌듯한 장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환호의 입성은 바로 고난과 아픔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바로 그 모진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비장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나의 모든 죄짐을 대신지는 길이었고 저와 여러분의 죽음을 대신하여 험악한 십자가 지고 죽어 주시는 무거운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이 한 주일 동안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을 아주 간결하고 덤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때 쾅쾅 울리는 망치 소리,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신음 등을 기록할 만한데 그러한 것은 생략하고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가복음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누가복음 2333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요한복음 1918그들이 거기서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그런데 마태복음 2746과 마가복음 1534절은 예수님의 고통이 절정에서 외치신 소리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께 드린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시편 221절을 인용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의 모습을 예언한 구절이 나옵니다. 6~8절을 보면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고 보는 자가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8절을 보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을 눈에 보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제목은 당연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 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입니다. 이것 제가 실수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는 실수가 아니라 유명한 저서의 제목입니다. 독일 출신이며 희망의 신학으로 널리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교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저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 아버지가 아들을 버린 것은 아버지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은 그 죽음으로 고통을 받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당하신다. 아들의 죽음만큼 큰 것이 아버지의 고통이다. 아들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아버지 되신 죽음을 고통당하신다.

저도 몇 년 전 장신대 학술세미나에서 몰트만 교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몰트만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 측에 잡혀 3년 동안 벨기에와 영국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미군 부대의 군목이 준 신약과 시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절망만이 지배하는 어둠의 골짜기인 포로 생활 속에도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포로 생활 중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성경 읽기를 넘어 하나님의 정의(正義)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두고 신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을 끝낸 뒤 1948년 괴팅엔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 1952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를 떠나지 아니한 것은 십자가의 신학이었다. 십자가의 신학이 나의 신학적 사고를 이끌어 가는 중심점이었다. 이것은 가시철조망 속에 사로잡힌 전쟁 포로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었던 나의 전쟁포로 시대로 소급한다.’ 그리하여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고자 한다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야 하며, 그리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자유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역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 끝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 해석합니다. 성부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고 아픔을 당합니다. 성부는 성자와 깊이 결합되어 있는 동시에 성령을 통해 성자로부터 구분됩니다. 성자의 십자가 고난 때 아픔을 당하신 성부는 성령을 통하여 죽음으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을 갖고 함께 고통당하시며 죽음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십니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습니다. 가치가 전도되어 버린 무대는 빌라도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수가 되어 침묵하셨고 권력 지향적인 총독 빌라도와 고발하는 무리가 크게 떠들었습니다. 여러분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간악한 죄인들이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고발하고 또한 재판하게 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그 언젠가는 이처럼 비정상적인 것이 바로 잡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죄인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대제사장, 빌라도, 무리,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뭇 죄인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이없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죄수 바라바가 놓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무지한 백성은 더욱 악해져 그 피의 대가를 자기들과 자신의 자손들이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두려운 일인 줄 알지 못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옷을 벗겨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쓴 채 희롱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이르러 강도 둘과 함께 거기에 못 박혔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인 존 스토트 목사가 쓴 THE CROSS OF CHRIST 라는 책의 <긴 침묵(The Long Silence)>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 광장에 모여 서 있습니다. 심판에 앞서 사람들이 불평을 터뜨립니다. 나는 나치의 공포를 겪고 고통 속에 죽임을 당했다.” “나는 흑인이라 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다.” “내 지독한 가난을 누가 알 것이냐?” “전쟁, 포로, 학대, 나는 이런 것들을 다 당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악과 고통을 허용하시고, 당신 자신은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살고 계시니 행복하기만 하실 거다. 어떻게 이 고난을 알고 재판하실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도피자일 뿐이다.” 그들은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대표자로 선출했습니다. 학살당한 유대인, 가족에게 배반당한 사람, 억울한 재판을 받은 사람, 잔혹한 고문을 당한 사람 등이 대표로 뽑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재판관을 하시려면 반드시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당해 보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 가셔서 이런 비참한 삶을 경험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박해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출생의 합법성을 의심하게 만들자. 그에게 아주 힘든 일을 맡겨 가족들도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게 하자. 가장 친한 친구가 그를 배신하게 하자. 억울한 재판을 받고 고문을 당하게 하자. 철저한 외로움을 맛보게 하자. 그를 죽게 하여 아무도 그의 죽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자.” 그들이 이런 결정을 내렸을 때 군중 속에서 커다란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표들의 마지막 말이 끝났을 때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모두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벌써 그들의 이 선고를 다 수행하셨던 것을. 그렇지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저들이 말한 그 모든 고난을 온몸으로 겪으신 것입니다.

 

세 시간 동안 계속된 어둠의 마지막에 들려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이 말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강렬한 그리스도의 외침, 정녕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버렸단 말인가요?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영혼을 부탁하는 아들을 버릴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까지 폭력과 조롱으로 아들을 괴롭히는 자들의 죄악을 참고 바라보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형벌을 받는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이 고통을 외면하셔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침묵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자들의 강압 속에 후미에(성화상)를 밟고 나서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배교한 것을 괴로워하며 순교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원망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들었던 하나님의 대답은 이와 같았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아시며 우리보다 더 애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버리시고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 십자가와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고 영원한 나라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중심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순간, 갖가지 표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하늘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10:19~20)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온 자연계가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에 따라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고 가까이 있던 백부장과 군병들 같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27:54)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홀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로운 미래를 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봅니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할 때 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일선에서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기독 방역당국자들과 의료인들, 봉사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 의사뿐만 아니라 불신 의사도 이러한 경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3.27일 교회 밴드에 올린 38세의 이탈리아 율리안 우르반, 롬바르디아주 코로나바이러스 의사의 간증이 있습니다. 영상을 보면 그가 3주 동안 병원에서 겪은 일은 악몽 같은 현실은 상상도 못 해본 것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실려 왔고 그다음은 몇십 명, 그리고 몇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죽음을 맞으러 집으로 보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라벨을 붙이는 사람들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동료들은 무신론자들, 부모님이 교회 나가는 것을 비웃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9일 전 75세의 한 목사님이 확진자로 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호흡곤란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주위의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 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성경을 잃어주곤 했습니다. 거기서 의사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곳의 의사들은 피곤함에 지쳐 눌려 있는 의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2명은 사망했고 다른 동료들도 감염되어 확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의사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꼈고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변화를 믿기지 못해 합니다. 그렇게 무신론자들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평안을 구하고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75세의 목사님은 안타깝게도 돌아가셨습니다. 2~3주 동안 그 병원에서 12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이 어떻게 도와드릴 수 없는 위중한 가운데 있던 목사님은 하늘의 평화를 누리다가 별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르반 의사와 동료도 그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기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시어 우리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 의사는 6일째 집에 들르지 못했고 언제 마지막 식사를 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고 자신의 무익함을 깨닫지만, 자신들이 죽는다해도 숨질 때까지 다른 이들을 돕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으로 인해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들을 구원하고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구원할 방법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거리끼는 것이기도 하고 미련한 것처럼(고전 1:18, 23) 보입니다. 주님의 방법은 사람의 눈으로는 패배의 방법이요 실패의 방법이었습니다. 고통의 방법이며, 무기력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활화산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은 세상 지도자가 갖지 못하는 긍휼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자기희생이 있습니다. 특히 고통받는 자, 슬퍼하는 자, 핍박받는 자들을 향해 그 고통을 그분의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짊어지고, 대신 십자가에 달리는 긍휼의 사랑입니다.

이는 분명 역설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음 가운데 이미 그렇게 내어주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이 동일하게 고통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처절한 고뇌와 절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은 이 땅의 버림받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은 누구의 눈에 발견되지요?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의 눈에 발견됩니다. 이 세상의 현실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탄식하며, 신음하며 존재합니다. 그들이 눈에 띄는 것은 그 고통당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눈에 의해서입니다. 전쟁의 모순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위기의 현장 속에 다른 동료들과 같이 아파하고, 공포에 떨며, 죽어가는 사람을 목격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같이 아파하고 신음했던 경험이 있던 몰트만 자신의 체험 속에서 발견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고통 당하는 사람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어준 바 되신 하나님이 그 고통 속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처절하고 불행하고 저주스럽고 절망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고통은 생명과 구원과 소망과 복과 은혜로 이어집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코로나 시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12:2)시기 바랍니다. 고린도 후서 48~10절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202045일 종려 및 고난주일 설교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각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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