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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박승남 20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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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8:1-10절 개역개정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8:1~10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예수님

 

유월절 기간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었습니다. 우리식으로 주일 새벽 45시경입니다. 하루 , 이 시각이 가장 어둡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올라갔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밤에 상여를 안치해 놓은 집을 지나치려면 무섭고 오싹오싹해지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두 여자는 아직 밟기 전 새벽에 무덤을 향하여 걷고 있습니다. 무섭지도 않았을까요? 더구나 무덤에는 우악스러운 군인들이 치키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무덤으로 간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옛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캄캄할 때도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새벽마다 주일 밤 그리고 삼일 밤에도 예배당에 갔습니다. 비록 어두운 길에 무서울지라도 찬송하며 예배당에 갔습니다. 밤중에, 새벽에 예배당에 갔을까요? 예배드리는 것이 좋아서였습니다. 예배당에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교제하는 것이 좋아서입니다. 예수님이 좋았습니다. 예배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예배는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사랑하면 장애물이 있어도 정면 돌파하고 뛰어넘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지금 여인들은 대단한 용기를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나요? 그렇게도 크고 싶어 하던, 예수님 덕분에 한자리 차지하고 싶었던 제자들은요? 저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습니다. 사람은 위기가 오면 본색 -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인들은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그 본색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여인들은 숨어서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자리, 지위, 직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높은 자리, 중요한 지위, 그럴듯한 직함이 있는 사람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입니다. 진정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공동체에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러기에 함께 울고, 고난을 육체에 채웠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 살아 계실 때 향유를 부어 드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 드리기 위해서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지진이 났습니다. 보통 지진이 아닙니다. 두 여인은 집을 나서서 무덤으로 가는 도중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무덤 앞에 당도하자 일어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그 천사들이 무덤 앞을 굳게 막았던 돌을 굴려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무덤 앞에 막았던 그 돌은 약 2톤 정도의 무게입니다. 연약한 여인은 물론 장정들이라도 옮길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돌은 로마 제국의 권위로 봉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있다 해도 당시 세계를 제패한 로마의 권세를 능가하는 권위가 아니면 그 돌을 굴려내지 못합니다. 또한, 로마의 정예 군인들이 이 무덤과 돌문과 시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과 같이 흰 모습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면 인간의 역사는 뒤집혀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로마 군대가 무너졌습니다. 로마 군대가 무너진 것은 총독의 권세가 무너진 것이요, 로마 황제가 무너진 것입니다. 저들은 경비병에게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였지만, 그것이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주님을 가둘 수 있습니까? 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가둘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악한 권세가 잠깐 대단하게 보일 수 있고 진리를 교회를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드러날 것입니다. 그 초라한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리 겁낼 것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믿음으로 살면, 내일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라도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박해와 환란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교회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고 순수하게 되어지고 더욱 빛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두 여인에게 여유 있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5) 여러분 무서워 떨어야 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로마 군병들 그리고 빌라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무서워 떨어야 할 것이지만 주님의 자녀들은 너희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떨어도 주님의 백성들은 떨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장이 누구시죠?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이어서 천사는 6절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을지라도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그랬으면 기독교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소망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천사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 그러면 언제 어디서 말씀하셨나요?

1. 교회의 설립과 십자가와 부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마태복음 1621, 마가복음 8:31 그리고 누가복음 9: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마태복음 말씀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때로부터라고 하는데 이때가 언제인가요? 바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는 누구라고 하느냐 물어보시고 이에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 그리고 이후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뒤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신앙고백을 하게 하시고 교회설립에 대해 말씀을 하신 뒤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끌고 가신 가이사랴 빌립보는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던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신이고 세상의 주인이라고 선포하는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주님의 일행이 나타났을 때, 그곳 사람들은 초라하고 옹색한 차림새를 보고 우습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서슴없이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신(), 세상의 주인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여러분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당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을지라도 거기에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없다면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과 교회는 뗄레야 뗄 수 없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누구의 교회이냐? 바로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기타 어느 누구도~ 우리는 단지 주인을 섬기는 청지기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와 십자가와 부활과 어떠한 관계가 있나요?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빼 버리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 대해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로 인해 교회가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교회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는 주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권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구원을 이루셨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고 주님의 나라가 이뤄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켜준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공동체를 위해 빨래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던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그 아름답고 귀한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은 빨리 무덤을 떠나 달음질합니다. 한 편으로는 무섭고 한 편으로 너무 기뻐서 말입니다. 여인은 죽음의 사건을 보려고 무덤에 갔는데 오히려 생명의 사건 - 부활의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사명자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뻤고 얼마나 놀라워겠습니까? 주님을 뵙게 되는 기쁨,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절은 주님을 만난 날입니다. 우리도 새롭게 주님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으로 뵐 수 없을지라도 내 마음으로, 내 영혼으로 새롭게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로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현실이지만 그러나 그런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회복되고 고양되어 기뻐 뛰며 감사하고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고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두 여인을 만나 주신 예수님은 평안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여인들은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평화의 주님은 평안한지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평안한지 물어보십니다. “너희들 평안하냐?” 여러분 편안하십니까? 아니면 두렵고 불안하고 근심 걱정이 많으십니까?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10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러분 갈릴리는 바로 첫사랑, 첫 출발의 장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 함께 귀한 시간들을 지냈던 곳, 놀라운 역사도 많이 체험했던 갈릴리!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좌절과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새출발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실패하고 무능하고 세상에서 지탄받는 한국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하자!” 이연길 목사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는 너희 인간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하면서 인간들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에게 돌아갈 때 만 이 재앙을 그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맞아 우리 각자 우리의 문제, 잘못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주님을 만나 새 출발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치유의 기적과 십자가와 부활

두 번째 말씀하신 것은 누가복음 943~44을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낫게 하신 뒤입니다. 그리고 17:22~23을 보면 갈릴리에 모일 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고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9:44)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매우 근심(17:23)하였고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9:45).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신 이후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는 나음(라파) 치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치유를 위합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치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능력, 권위에 압도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명성, 인기는 매우 높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제자들은 더욱 의쓱 거릴 수 있는 때입니다. 물론 고치지 못해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을 받았기에 송구스럽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욕, 명예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려 하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서 대리 만족이라고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역, 우리 문중, 우리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으쓱하게 됩니다. 이 말씀 뒤의 기록을 보면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9:46) 일어납니다. 제자들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등에 업고 한자리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할 때 주님은 찬물을 끼어 놓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죽임을 당하리라.

여러분 십자가는 무거운 것입니다.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지기 싫어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사람, 자기를 내려놓는 사람, 희생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을, 민족과 공동체를 사랑하며 섬기려는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고 그때로 되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이뤄지고 행복한 세상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치유 사역을 하시면서도 결코 그 마음에 인기, 세상적인 권력, 물질을 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고치시고 살리시는 일을 하신 것은 병든 자들, 연약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십자가 정신없이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 높은 자리를 얻고 명예를 얻겠다는 사람은 그야말로 자신과 다른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결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1,109명의 사람이 나섰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들이 적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진정 지도자다운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란 선악을 판단하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을 잘 골라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고난, 죽음을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서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도 이해 못 했는데 부활을 이해했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를 아는 사람, 예수님을 닮아 사랑으로 희생과 헌신과 섬기는 사람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부활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천국의 정신과 십자가와 부활

3번째 고난과 부활예고는 마태복음 20:17~19절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여기에서 십자가가에 대한 말씀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일 바로 앞에 포도원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주인은 놀랍게도 청지기를 통해서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과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사람 모두에게 1데나리온을 주게 합니다. 그것도 늦게 온 사람부터 주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더 받을 줄 알았던 먼저 온 자들의 원망이 자연스레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인은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주님은 손익계산으로 나를 따르지 말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 아버지의 마음, 사랑의 마음, 가족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꾼이 되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헌신하고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면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 이거뿐이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나는 일찍부터 와서 뼈 빠지게 일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가 있는가? 하지만 주님은 한없이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거기에 무슨 반항도 없으셨습니다. 떨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알아달라 하지도 않으셨다. 아니, 제자들조차 몰라주어도, 배신해도 개의치 않고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때에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새 몸으로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주님의 부활은 바로 늦게 와서 일한 자 같이 행하신 주님의 섬김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과 같은 정신,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이루는 나라입니다. 여러분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은 어떠한 공동체인가? 어떠한 사람들이 모여 이뤄지는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겸손히 헌신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은 예수님처럼 늦게 와서 일한 사람처럼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늦게 온 사람은 자기를 불러 주신 것만 해도, 써 주신 것만 해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바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1시간 일하고 얼마 받기를 바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3번씩이나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놀랍게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기억하지 못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주님,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19세기 미국의 최고 시인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 ~1882)는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습니다. 아내가 젊어서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고 재혼한 아내마저 몇 년 안 된 1861년 부엌에서 화상을 입고 앓다가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롱펠로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그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집니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2020412일 부활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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