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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여 새사람 되고 박승남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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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7:27-31절 개역개정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7:27~31 변하여 새 사람되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구분도 그렇습니다. BC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과 AD ‘anno Domini’입니다. AD는 라틴어로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작년이나 올해나 내년이나 늘 주님의 해입니다. 그런면에서 주후라는 말은 맞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은 BC AD는 다릅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인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최근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 virus)’BC, ‘코로나 이후(After Corona virus)’ AC로 부르며 세계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After Disease라고 AD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코로나 사태는 우리 인류에게 엄청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태껏 바이러스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10조 원을 썼다면 향후 닥칠 후폭풍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얼마를 투입해야 할지 모르는데 전문가에 의하면 미국과 유럽이 코로나로 인해 시스템이 깨지는 속도, 규모를 감안했을 때 최소 1,000조는 써야 할 것이고 그것도 선제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응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들어간 것은 후폭풍과 비교하면 겨우 1%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이 요구되고 있는 때, 코로나 이후 시대를 이끌 대한민국의 꿈과 비전을 제시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또한, 국회와 국민의 당파와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 협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물론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교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180석을 얻은 것이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애굽의 그 모진 7년 흉년이 끝났습니다. 다시금 농사를 지어 수확할 수 있게 되었고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이 그렇지 1~2년도 아니고 7년씩이나 흉년이 든다면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령에 감동된 사람 요셉의 지혜와 지도력으로 그 모진 흉년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를 중심으로 한 애굽 나라가 우뚝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자연스럽게 있게 될 일은 시상식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요셉이라면 [국난극복 공로대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온 국민의 감사와 축하 속에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것 전혀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그다음으로 이어집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 자리를 잡은 일이 이미 언급한 것인데 또다시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는 그만큼 고센에 자리 잡은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일가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고센 땅에 거하면서 신앙적 변질도 막을 수 있었고 산업도 얻어 번성하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일자리도 얻고 재산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한 것입니다.

애굽의 모진 7년 흉년이 끝난 것처럼 이 코로나 흉년도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우리나라도 새롭게 도약하고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세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천지로 인해 확진자가 급속도로 증가하여 세계의 우려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세계가 칭찬하고 인정하고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 모든 국가가 자국의 문제로 헤매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본보기국가가 된 것입니다. 빠르고 광범위한 코로나 진단과 투명한 정보 공개 그리고 코로나 와중에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른 일 등이 해외에서 모범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단군 이래 최고의 '국운 상승' 타이밍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 한국이 코로나 이후의 롤 모델(본보기)국가가 돼 지구촌의 미래를 이끌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8천만 민족에게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 우리 민족이 꿈꾸고 소망했던 중차대한 일들을 공세적으로 추진하고 이뤄나가야 할 때로 대통령의 전략적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민족의 통일도 앞당겨져 북한의 그 무한한 자원을 활용하여 세계에 우뚝 서고 아울러 복음이 북한에 힘차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크리스천의 마음이 하늘로 그리고 북한으로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전광훈목사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독자유통일당이 21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동안 전광훈목사는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참람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대한민국이 전광훈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과대망상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어디 하나님과 친하다고 하나님께 불경하게 말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역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지 감히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이번에 기독자유통일당의 득표율이 겨우 1.8%뿐입니다. 대전장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이단사이비 전문가인 허호익 교수는 전광훈은 통일교 문선명을 뛰어넘는 신론적 이단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으며 전광훈을 지지하는 자는 이단 옹호자로 규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그가 얼마나 이 나라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었습니까?

우리 교단 충신교회 원로이자 전 총회장인 박종순 목사님은 편 가르기가 극으로 치닫게 될 때 우리만이라도 다리 놓는 사람이 됩시다. 분열과 증오와 다툼과 갈등이 아닌 만나는 쉼터가 됩시다. 그게 교회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 한국교회는 생명을 살리고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고 이 사회와 민족의 하나됨, 통일을 이루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자손들이 고센에 번영하며 안정되게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애굽에 온 이유는 외부적 상황 변화, 즉 흉년이나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가나안의 작은 한 부족이 약속의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400년 후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옮겨 주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나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죄악이 심판하실 정도가 못되었기에 유예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위시하여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가 가나안 막벨라에 묻혔고, 레아도 거기에 묻힘으로 후손들이 선영의 땅을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늘 사모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갈 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주님께서 언제 부르신다 해도 후회가 없는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이 얼마나 멋집니까? 감옥에 있는 그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1:21~24)

 

야곱은 풍요한 애굽 땅에서 풍성한 가운데 여생을 보냈습니다. 세월은 흘러 17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17살까지 아버지 야곱의 슬하에서 고이 돌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야곱이 요셉에 의해서 17년간 돌봄을 받아 온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 의해 잘 준비되어 그는 여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유리하는 나그네 생활을 하였으나 인생 말년에 총리의 아버지로 태평과 위안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을 잃고 라헬의 아들 요셉을 잃어버린 슬픔과 시달림을 이제 요셉의 효성으로 과거 눈물까지 말끔히 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보장된 노후를 잘 보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도 노년이 아름답고 복되기를 바랍니다. 요즘 노년의 4가지 고통(苦痛)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곤, 질병, 무위, 고독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과 질병으로 고통당하시는 것과 할 일이 없어서 무료한 것과 찾아오는 이가 없고 대화 상대가 없어서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것들이 바로 노인들이 겪는 4가지 고통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어르신들이 더 힘들어하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어르신들이 노년에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노년에 더욱 기도하며 찬송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하게 지내실 때 하늘의 위로와 은혜와 소망이 충만할 줄 믿습니다.

 

이제 어느덧 야곱은 죽을 날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호세아 124절 말씀대로 천사와 싸워서 이긴 야곱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낀 야곱은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인으로서 현세적인 유지, 먹고사는 문제로 인한 염려나 가족의 미래에 대한 염려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의 시체가 거룩한 땅에 있는 선영에 매장되지 않고 이방 땅 애굽에 매장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염려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또한 지금은 비록 애굽에 와서 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자손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게 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가나안 땅에 묻히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분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곳이 약속의 땅이었고, 또한 가나안은 하늘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처럼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천국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불러 유언으로 자기 장례에 대해서 엄숙히 맹세시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또다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불러 말하는데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네가 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있으면, 너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네가 인애와 성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여라. 나를 이집트에 묻지 말아라. 내가 눈을 감고,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면, 나를 이집트에서 옮겨서, 조상들께서 누우신 그 곳에 나를 묻어다오.” 얼마나 진지한 장면입니까?

 

그러면 요셉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만일 요셉이 효자와 앙인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었거나 무시했을 것입니다. 괜시리 유별나게 잡스럽게 하지 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효자이자 영적인 사람 요셉은 확실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너무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장례식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고 요셉은 죽기 전에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반드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테니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이 요청은 훗날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요셉의 말을 들은 야곱은 더 나아가 "그러면 이제 나에게 맹세하여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야곱의 의지가 얼마나 분명한지 맹세까지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아버지에게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맡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야곱은 죽은 후 가나안에 보금자리를 갖게 해주겠다는 서약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만족은 없었고 임종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좋은 모범이 되며,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임종 전에 만족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모습, 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의 마지막의 모습도 이렇게 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본향을 향하여 조상들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고 그의 소원대로 요셉이 약속하자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의탁했던 것입니다. 야곱처럼 우리 성도들은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임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야곱을 생각해 보면서 야곱의 일생을 정리해 봅시다.

야곱의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으로 창세기 2523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말씀과 바울 사도가 로마서 913절에서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성경 말씀은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선택 기준이 외적인 조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주권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간교한 사람으로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씩씩하고 활동적인 에서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부끄러운 야곱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그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고,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셨습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7~2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한 피조물로써,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유혹을 받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죄를 범하고 온갖 고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 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시고 홍수 심판 시 방주를 만들어 살게 하시고 어린양의 피로써 죽음의 재앙에서 건져주시고 가축을 드리는 제사를 통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사망을 대신 맛보게 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사망과 죄악 속에 있던 인간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삼아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3:17). 우리 주님이 속죄, 속건,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은 간절히 복을 갈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아버지의 저주와 형 에서의 미움을 각오하고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축복하려고 할 때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가서 기어이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또한, 창세기 3226절에 보면 자기와 씨름하는 천사를 향하여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쓸 정도로 복을 갈구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복을 받기 원합니다. 이는 바로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잠재해 있는 인간의 본성으로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복 받고 행복해지려는 본성을 만족시켜 주심으로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도록 역사하십니다. 창세기 2813절에서 15절을 보면 루스의 들판에서 잠을 자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세 가지 약속의 복을 주셨습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복만 원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는 관심 두지만,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복이 그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실 이 복을 받기 위해 얼마나 수고와 고생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정 복된 사람이 되어간 것입니다.

창세기 31장 이후를 보면 귀한 은혜와 복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뤄주시어 마침내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열두 명의 자녀를 선물로 받았고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때가 되매 그 약속하신 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야곱이 일평생 동안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때 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그 복을 찾기 위해 어리석게 헛된 우상을 찾아 헤매고 섬기고 또한, 남의 행복까지 짓밟고 자기만 행복해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일면 자기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저런 사건을 통해서 그런 야곱을 하나씩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부르게 하심으로 과거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던 야곱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구원과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겁쟁이가 담대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살던 야곱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게 되었으며 오늘 말씀처럼 가나안을, 천성을 사모하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왕 앞에서나 48, 49장에서부터 볼 수 있는 것처럼 축복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축복만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축복도 자기가 가로챘습니다. 라반을 경쟁자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서 축복하며 살아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축복이란 복을 비는 것으로 사랑으로 좋은 말, 복된 말을 해주며 그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으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도 주님의 은혜로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은혜와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20204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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