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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2- 스불론과 잇사갈 박승남 2020-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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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9:13-15절 개역개정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49:13~15, 39:8~10 스불론과 잇사갈

출애굽기 28장과 3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은 가슴에 판결 흉패 즉 심판할 때 필요한 가슴 패를 붙이라고 하십니다. 이 흉패 속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작은 두 개의 보석을 넣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도 하고, 판결 시 사용한 것으로 중동 지역에서는 재판 시 흰 돌을 던지면 무죄요, 흑 돌을 던지면 유죄였습니다.

그런데 흉패의 모양은 네모반듯합니다. 그러니까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율법에 따라 공의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네 줄로 12 보석을 물리(채우)라고 하십니다. 또한, 그 보석에 야곱의 12 아들의 이름을 도장 새기는 법으로 새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12지파를 보석같이 소중히 여기며 가슴에 품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도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배로 소중하게 여기며 목양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호숫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는 내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마음으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나의 양을 먹이고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름(지파)의 순서는 민수기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광야에서 진을 친 순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흉패 중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보석이 홍보석인데 그 위에 바로 유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보석은 루비처럼 진한 붉은 빛이 나고 아주 보기 좋고 매우 비싼 보석입니다. 야곱이 유다 지파를 축복할 때 포도나무, 포도주, 포도즙 이야기를 했습니다. 포도주로 빤 옷, 포도주로 인하여 붉어진 눈이며 또한 우리를 위해 붉은 피를 흘리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는데 잘 어울리는 보석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유다 지파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값지고 귀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유다에 이어 축복하는 아들이 바로 스불론입니다.

사실 스불론은 야곱의 10번째 아들입니다. 동시에 레아에게는 6번째 아들입니다. 스불론 앞에 그 형인 레아의 5번째 아들인 잇사갈이 있습니다. 그래서 5번째 아들은 단이나 아니면 잇사갈을 먼저 축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만 웬일인지 야곱은 스불론을 먼저 축복했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스불론이 유다 옆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야곱만 그리한 것이 아니라 신명기 33장의 모세의 축복을 보아도 잇사갈 보다 스불론을 앞세웠습니다. (18) 그리고 여호수아 19장을 보면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도 스불론이 잇사갈 보다 앞섰습니다. 그러니 이는 야곱이 혼미한 상태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확실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적인 것과 같이 혈연, 서울 등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막내, 차남이 더 귀하게 쓰임 받은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레아는 잇사갈에 이어 아들을 낳고 보니 야곱은 자식을 보고 싶어서라도 자기와 함께 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거함이라는 뜻으로 스불론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거한다는 말은 대단히 깊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거하시매라는 말 속에는 장막을 친다’, ‘거처를 마련한다’, ‘함께 산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성탄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을 말합니다.

훗날 야곱은 레아와 함께 묻히며 영원히 거하게 되었습니다. 레아의 소원은 죽은 다음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스불론의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며 우리를 신부 삼고 영원한 생명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스불론 즉 거하심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스불론 하심으로 온 인류와 하나님이 같이 한 장막에 스불론 즉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레아의 소원이 스불론로 인해 야곱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면 우리의 소원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15:9)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늘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스불론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어떠합니까?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스불론아, 너는 바닷가에 살게 되리니 그곳은 배를 정박시키는 항구가 되고 너의 영토는 시돈 땅까지 이르리라)

바닷가에 살게 되고 그곳이 항구가 되고 시돈까지 이르게 된다면 해상 무역, 해상 강자로 살아가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해상왕 장보고 같은 사람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가나안을 점령해서 땅을 분배할 때 지중해 해변을 경계로 기업으로 받은 지파는 스불론이 아니라 아셀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9:10절 이하를 보면 스불론 지파가 받은 땅은 지금의 나사렛을 포함한 지역으로 갈릴리 호수 남서쪽 구릉지대이며 골짜기가 조금 포함된 지역입니다. 땅도 작습니다. 이들의 인구는 유다와 단과 잇사갈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을 정도로 큰 지파였습니다(6500명 민26:27). 그런데 땅이 작습니다. 그리고 스불론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해안와 전혀 닺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AYBC(Anchor Yale Bible Commentary) 씨리즈 여호수아 저자인 Robert G. Boling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야곱의 축복에서 스불론과 아셀지파가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본의 실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조심스럽게 말하면 스불론과 아셀지파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고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사실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재앙에서 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만들어 준 복을 재앙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 결국은 재앙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재앙이 가득한 것 같았는데 복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흙수저, 장애인으로 태어났더라도 수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영적인 사람이 된 화니 제인크로스비 여사같이 또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는 못하는 3중고를 안고 있었던 헬렌켈러가 그것을 다 극복하고 휼륭한 인물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 사람의 운명은 분명히 바뀝니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운명이 정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이 정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운명론 또는 숙명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섭리, 은총을 '예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뿐 예정론은 분명히 숙명론이 아닙니다. 예정론과 숙명론은 사실 완전히 반대 개념입니다. 숙명론은 이단에서나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믿음으로 살아서 우리의 운명이 재앙이 아니라 복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재앙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불신앙이 재앙을 불러올 뿐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오늘 체념하지 말고 자신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는 복으로 가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지만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 저주같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레위지파는 그 재앙을 복으로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경고를 받고도 새롭게 믿음으로 인생을 개척해가지 못했습니다. 스불론 지파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본래 해안의 땅을 받았습니다.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해상 무역을 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많은 부를 축척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그 복을 발로 걷어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곱이 축복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지역을 받았습니다. 해안지역과는 전혀 땅이 접하지 못하였고 가장 작은 땅 중에 하나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집안 환경이 어렵습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숙명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바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복의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불론에게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대제사장의 가슴에 새겨진 스불론 지파의 보석은 녹주옥 에메랄드입니다. 그리고 녹주옥은 번쩍이다, 번쩍 빛나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지파가 될 것이겠습니까?

스불론 지파는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지파의 순위 상 뒷줄에 있었고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조그마한 곳 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나 역대기를 보면 스불론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봉사의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사기 410절을 보면 드보라를 도와 가나안 군대의 장군 시스라를 잡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사기 518절입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그리고 사사기 723절을 보면 스불론도 미디안 군대와 싸우는 기드온의 부름을 받고 응해서 미디안을 추격하였습니다. 또한, 역대상 12:33절을 보면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변함이 없이 충성한 일꾼들, 그러면서도 전혀 자신을 내세우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던 사람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기뻐하시고 은근히 잘 되게 하십니다. 스불론은 앞보다 뒤가 좋은 지파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다니엘 12:3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의 지혜, 복음의 지혜가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주님께 돌아오게 한 자 그들은 하늘에서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불론의 보석 상징을 통하여 스불론이 배 매는 해변에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이 복을 전 세계에 실어 나르기 위해 배를 매어 두는 항구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33:18절을 보면 모세는 스불론에 지파에 대해 이렇게 축복합니다.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나감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세계 속에 나감을 기뻐하라. 그것을 네 사명으로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널리 증거하는 교회, 성도는 에메랄드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됩니다.

선교사들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파란 눈의 선교사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 민족을 향한 선교사들의 애절한 사랑과 그들의 헌신의 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 R. 아펜젤러 선교사)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은혜로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값없이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

그렇습니다. 우리는 멀리 가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내 가족, 내 이웃, 내 직장동료가 복음을 전해야 할 예루살렘이요 유대요 사마리아요 땅끝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에메랄드처럼 빛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축복한 아들이 잇사갈입니다.

잇사갈의 출생이야기는 창세기 3014~18절에 잘 나오고 있는데 잇사갈도 레아와 라헬이 서로 아들을 낳으려고 기를 쓰는 가운데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러면 잇사갈에 대한 축복은 어떠합니까? 14~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잇사갈은 안장 사이에 웅크린, 뼈만 남은 나귀 같을 것이다. 살기에 편한 곳을 보거나, 안락한 땅을 만나면, 어깨를 들이밀어서 짐이나 지고, 압제를 받으며, 섬기는 노예가 될 것이다.

건장한 나귀가 뻐만 남은 나귀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건장한 이라는 단어 게렘은 뼈라는 뜻도 있고 강한 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잇사갈에 대한 축복은 전체적으로 볼 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잇사갈 지파는 가나안에서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전략요충지인 므깃도와 경작하기 쉬운 기름진 평원이 있는 이스르엘이 포함된 땅입니다. 그래서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분명 축복입니다. 하지만 안락한 생활이 항상 좋은 게 아닙니다. 편안해지면 하나님을 잊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게 지내다 결국 타국에 공물 바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누구나 안정된 삶을 구합니다. 그러나 잘살게 되면 하나님을 건성으로 섬깁니다. 문제가 없으니 도움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실제로 잇사갈 지파는 지배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힘든 노동과 농사일에 전념하게 되었고 납세의 의무에 지게 되었습니다(왕상 9:21; 대하 8:8).

잇사갈은 일만 하고 빛은 별로 보지 못하는 그러한 지파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적으로 생각해 보면 안쓰러운 지파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잇사갈은 어쩔 수 없이 어깨를 들이밀어서 짐이나 지고, 압제를 받으며, 섬기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진리로, 성령으로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자신이 먼저 섬김을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종처럼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주님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잇사갈은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잇사갈이 되는 사람들은 주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비록 세상에서 아무런 상급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늘의 상급은 놀라운 것입니다.

 

판결 흉패에 잇사갈 이름이 두 번째로 물려있는데 보석은 황옥(피트다)입니다.

황옥의 영어 이름은 토파즈(Topaz)이다. 황옥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돌은 의례 노랑일 거라고 오해하기에 십상입니다. 그러나 정작 황옥은 노랑, 파랑, 분홍 및 갈색 등 다양한 색으로 산출됩니다. 그런데 황옥 헬라어로 추구하다의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돌은 홍해에 있는 안개가 자주 덮이는 한 섬에서 발견되었는데 항해자들이 그 섬을 발견하기 전에 오랫동안 찾아 헤맸기 때문에 그들은 그 보석을 추구하다 라는 의미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즉 열심히 찾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황옥의 보석엔 잇사갈 지파의 이름이 새겨졌는데 이는 잇사갈의 이름의 뜻과 관련됩니다.

잇사갈의 어머니 레아는 자녀가 있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레아의 아들인 장자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하고 가지고 왔습니다. 뿌리가 사람의 다리 모양으로 통통해서 정력제요 임신 촉진제로 알려진 식물입니다. 아이를 원하는 라헬이 달라고 했고 레아는 거절했습니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고도 또 합환채까지 빼앗으려고 하느냐?” 반드시 먹어야 하겠다는 욕심에 라헬은 합환채 대신 그 밤에 남편을 레아에게 보냅니다. 야곱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마치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배구공과 같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내들이 자녀를 가지려고 서로 경쟁을 했기에 야곱은 그런 곤경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잇사갈입니다. 레아는 라헬에게 불임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고 생각되는 합환채를 주는 대가로 남편이 자기 방에 들어오게 함으로 아들을 얻을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낳게 된 아들의 이름을 보상이 있다’, ‘’,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의미로 잇사갈 이라 지은 것입니다. 잇사갈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상황인데, 남편의 사랑을 추구한 엄마 레아가 대가를 지불함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가를 지급한다는 의미는 그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에도 들어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방식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급해줌으로써 자신의 신부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합환채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닌, 그것도 그 누구를 당황하게 만듦으로써가 아닌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린도 전서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았지만, 그 은혜는 주님의 고난의 대가가 지불됨으로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를 받는 순간 값을 수 없는 영원한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평생 주님께 대해서 빚진 의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평생 갚는다고 해도 도저히 값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주님의 원대로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며 섬길 뿐입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예수님과 함께 살며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대로 섬김의 삶을 힘쓰며 주님의 지상 명령이신 전도와 선교, 영혼 구원하는 일에 힘써 녹주옥(에메랄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신 황옥(토파즈)같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값을 드릴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524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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