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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축복3 - 단, 갓, 아셀 박승남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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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9:16-20절 개역개정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49:16~20 , , 아셀이 받은 축복

 

서울 노원구의 한 상점에서 티셔츠와 가게 주인의 휴대전화를 훔쳤다는 절도범으로 몰려 죄줌마(+아줌마)가 되었던 황당한 경험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지요. 다행히 1달여간의 조사 끝에 누명을 벗게 되었지만, 지금도 당시 조사받을 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자칭 억울하다고 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라헬입니다. 라헬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억하심정이 생겨 자기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낳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라고 하고는 그 아이 이름을 이라 하였습니다(30:5-6).

이라는 이름은 우리 성경을 창세기 30장을 보면 밑에 억울함을 푸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자기 억울함을 판단하셔서 빌하를 통해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그녀의 소리를 듣고 변호하셨는지 아들을 주신 것일까요? 그리고 라헬은 정말 억울했던 것일까요? 자식을 낳지 못해 속상하고 안타까워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억울할까요? 사랑을 빼앗긴 레아 때문에? 아니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주는 야곱 때문에 억울한 것일까요? 진정 억울하다면 아버지 때문에 원치 않게 야곱과 동생 라헬 사이에 끼어들게 되고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겨 남편의 사랑을 도무지 받지 못하는 레아가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이런 것을 보면 사람은 다른 이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해 억울하느니, 슬프다느니, 속상하다느니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치졸한, 속 좁은 인간을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시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으니 놀라울 뿐입니다.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인 단은 재판, 판관, 판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이 판단하셔서 억울함을 풀어주셨다는 의미로 단이라 이름을 지었겠지요. 단이라는 이름이 들어있는 다니엘나의 심판자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자기 이름의 뜻과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6절입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축복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에 대해 뱀, 독사로 표현했습니다. 그것도 길섶의 뱀, 샛길의 독사입니다. 길섶은 원어로 보면 길, 생의 여정, 통행자라는 뜻입니다. 샛길은 ', 통로, 작은 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뱀과 독사는 상징적으로 간교하고, 길가는 행인을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정적인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단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에 긍정적이고 선한 몫을 담당하기보다는 엄청난 누를 끼치는 지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과 말에 탄 사람까지도 해치는 독사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니 지독히 저주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임종 시에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단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을 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는 영적으로 깊어져,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의 결국을 내다 본 야곱이 안타까워하며 단을 대신하여 주의 구원을 기다린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지파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12지파 역사 속에서 단 지파가 제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였습니다. 단 지파는 우상을 끌어들였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당의 본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8:30절을 보면 단 지파가 첫 번째 우상을 세우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뿐만 아니라 그 위에 탄 사람까지 해치는 뱀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입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2:28, 29절을 보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이 정치적 동기로 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하나를 단에 두어 섬기게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본거지를 자기들의 땅에 두는 것을 그대로 용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를 말하면서 삼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지파 중에서 유명한 사람인 삼손은 대단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힘을 갖고 동족을 위해 썼을 때는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엉뚱하게 들릴라라는 여자로 인해 정욕을 위해서 자기의 능력을 허비하였을 때 자기 자신도 아주 크게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16:28절을 보면 삼손이 죽기 직전 이렇게 부르짖어 말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리고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는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이라도 회개하면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큰일을 이룰 수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보면서 야곱이 단 지파에 대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라고 한 말과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 지파를 통해서, 삼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하나님의 주신 힘과 지혜와 재능과 물질과 건강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인데 도리어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그리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데 써버리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능력이 있습니까? 어떠한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주님과 교회와 다른 이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욕심만을 위해서입니까? 그 차이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라지게 되므로 깊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단 지파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출애굽기 3913절의 첫 번째 나오는 녹보석입니다. 녹보석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 보석입니다.

(1) 정복자 / 당시에는 전쟁하여 이기게 되면 이긴 편 군사들은 가슴에 녹보석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승리의 표시입니다. 단 지파는 승리 지파 같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삼손도 늘 승리자 같았지만, 끝에서는 비극적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단 지파는 힘이 있어 늘 승리하는 것 같지만 주님 재림하시는 마지막 순간에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지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마지막 때에 하늘에서 지파별로 계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분명히 단 지파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여러분 끝이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마지막 웃음이 참 웃음입니다. 마지막 승리가 참 승리입니다. 처음 승리는 겨우 전초전일 뿐입니다. 단 지파는 시작은 승리자나 마지막은 사라진 지파입니다.

(2) 파괴자 / 녹보석은 승리자 측면에서 보면 정복자의 보석입니다. 그러나 패배자 측면에서 보면 단지파는 파괴자입니다. 녹보석을 달고 다니는 승리자를 패배자가 보면 파괴자일 뿐입니다. 녹보석은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상반된 성격을 드러 내고 있습니다. 단지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려고 발버등 치던 라헬의 씨입니다. 억울함을 풀어 보려고 악전 분투하던 아이 낳기 경쟁에서 불행하게 태어난 씨앗입니다. 결국, 그 씨는 우상숭배의 잡초를 이스라엘에 뿌리고 첩경에 숨어 사는 독 사같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마구 승리자같이 정복하여 나가는 것 같으나 결국은 역사의 지평선에서 사그라져버린 비극적 지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심는 대로 거둡니다. 단은 산 역사의 증인입니다.

 

라헬이 시녀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되자 레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도 역시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들어가게 하여 야곱의 일곱 번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30:9-10). 그리고 그 아들이 태어날 때 레아는 복되도다하고 그 이름을 이라 하였습니다(30:11). 그런데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공격하다’, ‘침략하다는 뜻의 구드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에는 군대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야곱은 갓 및 그의 후손들의 높은 사기와 용감성에 대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은 일단 공격을 받으면 다시 추격하여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는 지파입니다. 이러한 기질을 소유한 것은 갓 지파의 탄생기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부인 라엘과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경쟁합니다. 그래서 아들 낳기 경쟁이 벌어지는데 라헬이 시녀 '빌하'를 통해서 다섯 번째 아들 ''6번째 아들 납달리를 낳자 레아 역시 바로 '실바'를 주어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가 '7번째 아들 ''과 여덟 번째 아들 아셀을 낳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바로 추격한다' 해서 []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야곱의 12 아들 중에 가장 공격적인 성향이 있는 지파는 '시므온'지파였지요, 그러나 '시므온'지파는 이스라엘에게 해롭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 지파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갖추고 공격하는 적을 막아 내고 종족에게 평안과 안전을 가져다주는 기질을 가지는 성향의 지파였습니다.

갓지파는 오늘날 교회가 십자가 군병처럼 세상을 향한 복음의 전투적 의미의 강한 것처럼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한 지파였습니다.

신약교회도 세상을 향한 전투적 의미의 교회입니다. 어둠의 악한 세력들은 의에 진리를 부수기 위하여 늘 노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12:9절에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창세기 3:1 간교한 자로 묘사된 사탄은 때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대적해 옵니다. 또한, 때로는 간사한 천사 모양으로 나타나.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공중으로 쫓겨 내려와 공중의 권세를 잡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순종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는 성령의 검 곧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갓지파는 그이름처럼 일단 적의 공격을 받으면 다시 추격해 싸울 수 있는 용감한 지파입니다. 역대상 5:18절을 보면 "싸움에 익숙한 자가 사만 사천칠백육십 인이라이라고 합니다. 이는 3지파를 언급한 것인데 여기에 속하는 지파가 바로 갓지파입니다. 신명기 3320절을 보면 모세는 갓을 광대하게 하시는 이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용감성을 인정한 하나님은 갓(Gad) 지파에게 광활한 영토를 획득하게 해주실 것이니 이렇게 해주신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갓 지파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출애굽기 3911절의 2째줄 3번째에 나오는 홍마노입니다. 이는 견고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금강석을 말합니다. 그리고 금강석은 쇠보다 단단한 돌로 다이아몬드를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다이아몬드는 사람들의 용기와 충성스러움 혹은 승리를 상징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용기와 충성과 승리의 상징이 갓 지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어둠의 전쟁터를 향해서 출전 나팔을 불며 전진하고 있는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승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슴 속에 열두 제자와 같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삶을 품고 계십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지 못하다 단을 낳은뒤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억울했던 레아는 반응이 다릅니다. 녀도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는 모습은 라헬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심성은 달랐습니다. 실바 즉 몸종을 통하여 난 아이였지만 너는 복 받은 아이다라고 하며 이름을 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로 얻은 아들을 얻고는 기쁘다고 하여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비록 몸종을 통해서이지만 아들을 또다시 얻게 된 것이 너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란 뜻으로 아이를 아셀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셀은 행복한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는 기쁜 아이다. 너는 행복한 아이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이라는 이름의 단에 비해서 기쁨, 행복이란 뜻으로 아셀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우리는 갓이 얼마나 복 받으며 살게 되었는지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아셀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아셀 개인과 그 지파가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야곱과 모세의 축복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셀을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아셀은 아들 중에 더 복을 받으며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아셀은 복을 받을 것인데 형제들보다 더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셀은 우선 땅의 복을 얻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 땅에서 나는 식물이 기름진 것이라서 진상품이 되고 왕이 먹는 수라상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셀 지파가 기업으로 얻은 곳(19:24-39)은 악고 평야가 자리 잡고 있어 농사짓기에 적합하며, 지중해성 기후로 인해 포도와 올리브 같은 과실이 잘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셀은 그의 발이 기름에 잠기게 될 정도로 복을 누리고 뿐만 아니라 철과 놋으로 지은 요새처럼 튼튼하고 안전한 거주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에게 기쁨이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요? 사실 어느 한 사람이 복을 많이 받으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쁨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복을 나누기 때문이 아닐까요? 받은 복을 끌어안고 사는 지파가 아니라 나누며 베풀며 더불어 살아가는 지파 이 얼마나 복된 삶입니까!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1913년 헝가리 귀족의 딸로 태어난 메리안 프레민저(Marian Preminger)가 있습니다. 그녀는 성과 같은 집에 살면서 수많은 하녀와 하인, 개인 운전사와 가정교사가 있었습니다. 18세에 비엔나로 유학 가서 잘생긴 의사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일 년 후 이혼하였습니다. 그 후 배우가 되어 영화감독과 결혼하여 미국 영화계의 화려함과 환락 속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이혼하고 유럽으로 돌아와 유럽 사교계의 여왕처럼 지냈는데, 1948년 커다란 변화의 빛이 그녀의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유럽을 잠시 방문한 슈바이처 박사가 시골 마을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할 때, 슈바이처와 대화하는 중에 마음속에 하나의 빛이 들어온 것으로 그녀에게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보게 해준 빛이었습니다. 그 뒤 슈바이처 박사의 초청으로 아프리카 램버린(Lambarene)의 병원에 갔다가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흑인들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매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아기들의 목욕을 시켜주었고, 나환자들에게 음식을 먹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돕는 사람과 또 하나는 돕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는 돕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한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랑과 헌신의 길을 걸어간 그녀에게 '램버린의 천사'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여러분 아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파로 물질의 복, 땅의 기름진 복뿐만 아니라 사랑의 나눔으로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므로 인정과 칭찬과 존경까지 받는 사회적, 정신적인 복과 평안과 안전의 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보다 더 귀한 복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37:11절을 보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리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천국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의미는 온유한 자가 땅 부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은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살고 풍성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즐거워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복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천국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셀 지파는 대제사장의 가슴에 달린 보석이 출애굽기 3913절에 나오는 넷째 줄의 두 번째에 나오는 호마노(onyx)입니다.

호마노는 일종의 옥돌입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호마노라는 보석의 색상은 아주 진하게 붉은 색상이라고 합니다. 고대 히브리인과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보석은 두 가지의 상징을 가지고 사용되었습니다. 그 첫째는영광이고, 둘째는 축복입니다. 그들은 이 보석을 가지게 되면 큰 복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가문과 자신에게 영광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셀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입니다. 아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옮기면 야셰르입니다. 그리고 그 어원은 아사르입니다. 그리고 같은 아사르를 어원으로 하고 있는 에셰르가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구절은 바로 시편 1:1절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가 복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면서 열매 맺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진실로 원합니다.

20206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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