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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교회생활 박승남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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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4:1-4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1~4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생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지역적 공간이동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도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원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에크(로부터)와 칼레오(부르다 call)에서 유래된 단어로 '불러낸 자들(의 전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특히 여기 모인 우리들은 아름다운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1994년 부목사로서 구미시민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점촌시민교회 유흥종목사님을 통해서 부름을 받아 이곳 문경까지 와서 어느덧 26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아름다운교회를 이루고 있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1절과 같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부름에 일치하게 행하라,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2절을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교회 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께 배우면 됩니다.

겸손한 교회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10:45, 20:28). 또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있어서 미덕중 제일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겸손의 덕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동경국제대학의 총장은 언제나 교회에 나오면 신발장 소제를 한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나라의 보배요 장관 이상이신 총장께서 신발장을 소제함은 체면이 안 된다고 말리면 그분은 내가 학교에서는 총장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종입니다. 내 할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발장을 소제하는 것입니다라고 겸손한 교회생활을 보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겸손의 덕이란 바실의 말처럼 모든 덕 가운데 가장 보석 같은 덕입니다. 야고보서 4:6에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합당한 생활은 곧 겸손한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하면 겸손할 수 있을까요? 버나드는 말하기를 겸손은 인간이 스스로의 진실한 자기 인식의 결과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덕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는 만선의 기적을 체험한 뒤 그만 배에서 예수님 앞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을 새롭게 만난 뒤 자신이 얼마나 허물진 죄인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그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겸손히 사라지고 교만이 서서히 싹트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항상 부각시키고 인생 무대에서 자기 자신만이 주역인 양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그대로 느끼며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일본의 성경주석과 구로사기씨는 "겸손이란 자기 가치에 어울리게 취급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 그 이하로 취급받는 것을 개의치 않는 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무시했다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3절을 보면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한 교회생활입니다.

역시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입니다. 온유란 원어로 프라오테스인데 이는 거친 야생동물이 길들여 주인에게 잘 순종하도록 된 것을 말합니다. 힘이 있고 강하지만 주인의 지도에 스스로 통제를 받는 것,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사셨습니다.

인간은 동물을 길들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누가 길들이나요? 하나님의 다스려 주실 때 인간은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원래는 모세도 다혈질이요 살인자였지만 은혜를 받아서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3)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사에서도 깡패가 변화 받아 김익두 목사가 되고, 선교사를 괴롭히던 이기풍이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난폭하고 잔인한, 때로는 간음과 살인강도를 하던 자도 이처럼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되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조절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하고 온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결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짐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내하는 교회 생활입니다.

인내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비롯하여 공동체 생활, 사회생활을 하려면 인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대로 안 되고, 기분 나쁘고 속상하고 화가 날 때도 많아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없이 참으신 분입니다.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십자가까지 참으셨습니다. 주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인간 역사가 있은 이래로 가장 처절하고 비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국 그 잔을 마시셨습니다. 그 모진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참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과 고난과 절망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십자가는 두고두고 그 명예와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지탄받는 수치스러운 형틀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2절을 보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잠시 동안으로 끝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이나 부끄러움은 잠시 동안이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부끄러움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팔목이 찢기고 발이 찢기는 아픔은 숨이 맺는 순간까지 계속되어 숨쉬기도 어려운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정신적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정신적 아픔을 십자가에서 체험하셨습니다. 오죽하시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지으셨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러한 십자가의 고통을 다 참으셨습니다.

둘째, 배신을 참으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숱한 반대와 도전과 모략과 중상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3절을 보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큰소리 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가잖은 인간들이, 죄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그것은 굴욕이고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내가 쏟았던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얻지 못한 채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저도 26년간 섬기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가슴 아픈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 제가 부족해서 그러했겠지만, 갑자기 배신하고 등을 돌리는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러한 일로 인해 남은 상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고 도리어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기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들고 배신감에 잠 못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하나님을 향하여 저지르는 나 자신의 배신, 배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목회상담가요 기독교 작가인, 폴 트립 목사님에게 하루는 자기 아들 친구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들이 친구 녀석과 못된 사고를 저지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씩씩거리며 위층에 있는 아내에게 달려가서 아들이 자신을 속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진정하라는 몸짓하면서 말했습니다. “가서 기도 좀 하고 오세요.” 폴 목사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퉁명스레 말했습니다. “지금은 녀석을 위해 기도할 기분이 아니라오.”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충고했습니다. 아니요. 애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요.” 폴 목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문득 하나님이 이미 아들의 인생을 구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의 친구가 엄마에게 고백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양심을 자극하셨기 때문이 분명했습니다. 그 애의 엄마가 자신에게 힘든 전화를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내가 화를 가라앉힐 틈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아들은 늦게 돌아왔다. 아들을 두어 시간 쉬게 두었다가 녀석의 방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좀 나눌 시간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네게 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해 봤니?” 아들은 폴 목사를 올려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원래 빛 가운데 걸었어. 하지만 이번 주에는 어둠 속으로 한 발짝을 내디뎠더구나. 아빠는 네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빛 가운데서 살렴.” 그 말을 전해주고 폴 트립 목사가 방을 나가려는데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빠, 가지 마세요.” 고개를 돌리니 아이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아빠, 빛 가운데 살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요. 아빠가 도와주세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깊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님은 사랑 가운데 용납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서로 받아들이는 것,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탕자를 받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으로 기도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날 받으옵소서.”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찬송을 부르면서도 다른 사람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죄와 허물이 많은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묶는 줄과 같은 평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주시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진정 그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거나 온유하거나 인내하거나 서로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책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교회 직책이 명예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사역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직분으로 명예직이 아닌 경우는 사역중심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명예 중심은 대접받고 섬김받고 인정받으려는 것이며 사역중심은 그야말로 섬기고 봉사하고 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한 뒤에 누가복음 17:10절 말씀과 같이 행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느 날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그의 제자 레오날드와 함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레오날드는 본래 귀족의 아들이었으며, 자기의 특수한 배경과 신분으로 말미암아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자였습니다. 그의 그러한 특성 때문에 프란체스코 종단에 속한 형제들은 공동체 생활에서 자주 어려움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프란체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레오날드는 프란체스코가 탄 나귀를 끌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마음에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영적인 스승이라고 하지만, 귀족의 아들인 내가 보잘것없는 성장배경을 가진 이 사람을 이렇게 나귀에 태우고 돌아다녀야 하다니…….' 마음속으로 이런 불평의 소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타고 가면서도 레오날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던 프란체스코는 곧바로 이 레오날드 형제의 마음속에 불평이 가득하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여……. 형제가 맞소. 형제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 합당하오. 내가 걷겠소."

프란체스코의 갑작스러운 이 행동에 놀란 레오날드는 길에 끓어 엎드려 자기 마음속에 있었던 자존심과 시기를 자백했습니다. 그 후로 프란체스코 종단은 레오날드로 인한 결정적인 분열의 위기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성령의 사역에 의한 사랑과 겸손만이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에베소 교회의 소식을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성령은 베드로 일행과 고넬료와 그 친척과 친구들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찬송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을 녹여주십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 하나 될 수 없는 사람과 사랑하고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 됨을 성령이 하시는 것이지만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원수 마귀가 우리 속에 계속 공동체의 평화를 깨고 분열시키고 편당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누군가 꺼리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 원수 같은 사람, 안 좋게 보이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은 아닙니다. 주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사랑의 말을 건넵시다.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빛나고 따뜻한 눈동자가 있습니다.

둘째, ‘사려 깊게 들어주는 귀가 있습니다.

셋째, ‘겸손하고 부드러운 어투가 있습니다.

넷째, ‘얼굴 전체의 밝은 표정과 미소가 있습니다.

다섯째, ‘고개를 잘 숙이는 보들보들한 목이 있습니다.

누가 성령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어떤 신기한 신앙체험을 많은 하는 것으로 알기보다는 얼굴 윗부분의 모습만 봐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읍시다. 주님이 도우심으로 진정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화목한 공동체를 이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롭게 우리가 할 일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30주년이 4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롭게 도약하여 30주년까지는 새로운 일꾼들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역 사회에 인정받고 사랑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2020628일 교회설립 26주년 기념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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