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 박승남 2020-07-19
  • 추천 0
  • 댓글 0
  • 조회 839

http://areumdaun.net/bbs/bbsView/34/5769289

[성경본문] 창세기49:28-33절 개역개정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9:29-50:13 야곱의 죽음과 장례식

 

지난주 두 건의 굵직한 장례식이 있었으니 시장과 장군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민선 출범 이후 최초로 세 번 연속 서울시장을 지냈지만, 여비서 성추행 사건으로 경찰에 고소된 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6·25 때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그의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고 김일성 공산주의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립군 토벌한 일제 앞잡이였으나 끝까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었다는 것과 6.25 공을 과장해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파란만장하게 산 야곱의 죽음이 나옵니다. 야곱의 공과를 생각해 보면 사실 공보다는 과가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그는 12 아들 하나 하나에 알맞은 축복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받을 만한 그릇대로,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란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그런데 이는 민족 전체 즉 후손에게까지 주신 약속으로 대대로 이어져야는 복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와서는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제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28:13,14)." '너와 네 자손에게 주는 복', 자손 대대로 이어져야 하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후손에게 축복하는 특권까지를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 자손에게 하나님의 약속인 '희망'을 유산으로 넘겨주는 민족으로 이는 축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축복을 받고 축복해주면서 이루어 가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자녀들에게 물질을 유산으로 넘겨주는 민족입니다. 자녀들에게 물질을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서 온갖 부정과 불의를 하면서 돈을 모읍니다. 그러나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땅과 건물과 현금을 유산으로 받은 자녀들은 이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돈으로 도배를 한 가정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조상의 가문을 망하게 하고, 심지어는 나라까지도 망하게 합니다. 자손에게 희망과 약속을 넘겨주는 민족과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물질을 유산으로 넘겨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과 희망을 넘겨두도록 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야곱은 둘러선 자식들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나서 나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 내가 죽거든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 내 선조들 옆에 묻어다오.”

그러면 야곱은 왜 자기를 조상의 선영에 장사해 달라고 말하였을까요? 그때는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여 산업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할 때라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언을 남긴 것은 애굽은 아무리 살기 좋고 거기에 아무리 번성하고 행복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스라엘이 계속 살아갈 땅이 아니라 다만 잠시, 임시로 있어야 할 땅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이스라엘 족속이 돌아가야 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가나안 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갈 때, 죽을 때도 그 약속을 의지할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값을 주고 산 땅이 있습니다. 거리 막벨라 굴에 아내 사라가 제일 먼저 장사되었고 이어 아브라함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혔으며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가 묻혔고 이제 야곱 자신도 거기에 묻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 즉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33). 야곱은 조상들에게서 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자로서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 그의 험난한 나그네 인생길을 마친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면 롯의 아내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 가운데 열심히 살아가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의 장례식

죽은 다음 50장처럼 요셉이 주관하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바로의 허락을 따라서 애굽의 모든 존귀한 자들도 참여하였기에 얼핏 보면 애굽의 국장 같습니다.

먼저 야곱의 시신을 썩지 않고 되도록 오래 보존되도록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죽은 사람의 콧구멍을 통해서 고리 달린 기구로 뇌를 긁어내고 방부제인 몰약과 향을 채웁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로 배를 절개하여 내장을 제거한 후 그 자리에 향 재료를 넣습니다. 그 후에 전체 몸을 종려 당으로 씻기고 나무의 진 즉 수지를 바른 다음 세마포로 싸서 관 속에 넣습니다. 이 일을 위해 40일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의 의술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하나입니다.

당시 왕이 죽으면 72일 동안 곡을 했다고 하는데 야곱을 위해서는 40일을 포함하여 70일 동안 애굽 사람들까지도 곡을 했으니 거의 왕의 장례식과 비슷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애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은 궁전의 사자들을 보내서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으로 가서 장사 지내고 돌아올 수 있게끔 허락해 주시도록 임금에게 청합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그대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야곱의 장례 행렬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요셉과 함께하고 병거와 기병이 호위하여 요셉과 함께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이 길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 두려움과 절망 속에 울며 왔던 그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따라 엄청난 행렬로 소망을 품고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가고 있습니다. 가는 곳은 어려서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놀던 곳, 극진한 사랑을 받고 위대한 조상의 믿음 이야기를 듣던 곳입니다. 이때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10절을 보면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에 아닷 마당에 이르러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7일 동안 애곡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로가 야곱의 장례식을 야곱의 장례식을 위와 같이 허락한 것은 바로와 온 애굽이 야곱의 소망을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고센 땅에 거하고 있지만, 가나안 땅으로 언젠가는 떠날 것임을 시인한 것입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또 가나안 땅을 소망하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후손들은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 조상들의 선영에 장하면서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다시 한번 가다듬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매주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소망입니다. 분명한 소망을 가질 때 열심히 살고 죽을 때도 그 소망을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물려줍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링컨은 어린 시절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링컨에게 글과 성경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진정 어머니의 지식과 성품과 신앙과 사랑은 어린 시절 링컨이 받았던 최대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제 겨우 11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말입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링컨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를 두고 하나님 앞으로 먼저 간다. 나는 네게 좋은 집도, 좋은 땅도, 많은 재산도 물려주지 못해. 그러나 나는 네게 이 성경책 한 권을 유일한 유산으로 주고 간다. 너는 한 평생 이 가운데 있는 말씀으로 보배를 삼고, 재산을 삼고, 양식을 삼아 이 교훈대로 살아 나가거라. 그러면 네 길이 형통할 것이다.”

그 뒤 링컨은 그 어머니의 유언대로 성경을 애독하며 그 교훈대로 살기에 힘썼고, 마침내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흑인들을 노예 제도로부터 해방시키는 큰일을 해내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식에게 유언하게 된다면 무슨 유언을 남기겠습니까?

 

우리는 야곱의 유언과 그 장례식을 통해서 야곱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려고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가 물려주려 한 것은 바로 애굽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땅의 풍성한 생명의 양식과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야곱의 소망은 다윗과 솔로몬 왕을 통해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지성소에 임재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는 우리는 찬송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을 닻을 주리라.

그러면 이것이 정말 여러분들이 신앙고백입니까? 아니면 가사가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까?

이 찬송시를 작시한 에드워드 모우트 (Edward Mote; 1797-1874)목사님은 '영국 런던'에서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이 술집을 경영하였기에 어려서부터 방황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는 감명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가 마침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7세가 되던 어느 날, 자신의 습관대로 가구 제조장 뒤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언덕배기에 있는 널찍한 바위에 앉아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 경관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해 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까요? 행복하고 기쁜 일들도 있고 또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일도 있고 또 어떤 일들은 생각하면 속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 몹시 고생했던 일들이 생각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가운데서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나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모우트 목사님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니 온갖 어려움과 많았던 고난들이 떠올려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을 오늘날까지 인도하시고 지켜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너무너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자신이 앉아있던 넓은 바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는 시구가 강렬한 감동과 함께 떠올라 즉시 펜을 꺼내어 나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겠다. 오직 예수님만 나의 소망으로 삼겠다며 찬송 시를 썼습니다.

 

어느 목사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병실 문밖에는 면회사절이란 글귀와 함께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다만 불신 친구나 친지는 허락함> 마침 어느 불신 친구가 목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측은한 생각으로 목사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어떤가?” 목사가 말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지. 누구나 한번은 죽을병에 걸리는 법인데 내가 조금 먼저 걸린 셈이지.” 그 친구는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기독 신자에게 사절 된 면회가 불신자인 나에게는 허락되었는가?” 목사는 친구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자는 다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지만 자네 같은 불신자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일세.” 친구가 목사 친구에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정말 자네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보는가?” 목사 친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진짜 있다고 믿네. 자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예수 믿지 않겠나?”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습니다. 나도 자네가 믿는 예수를 믿겠네. 어떻게 하면 되겠나?” 목사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해 주며 말했습니다. 다음 주일 반드시 교회에 나가게 그리고 이제 됐으니 빨리 나가게.” 친구는 목사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왜 그리 서두르는가?’ 목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자넨 이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때 만나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기로하고 다시 못 만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봐야지.”

여러분은 천국의 확신이 있습니까? 진정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귀하신 피를 흘려주신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주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의지하여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146: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여러분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잘난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실로 흠과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난 뒤에 자기의 소망을 주님께 두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마지막 유언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가나안 땅에 묻어 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그는 애굽의 뭇 사람들에게까지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렇게 화려한 장례식이 치러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까지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 대학에 한 노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연세 많으신 라틴어 교수님이셨는데, 영어, 독일어, 불어는 기본이고 스페인어에다 몇 개의 동양 언어까지 구사하는 언어가 10개는 족히 되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까지 유창하게 구사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히브리어까지 하시게 되셨을까요? 교수님께서는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때 기숙사에서 만난 한 친구 때문입니다.

그 친구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친구랑 같은 방을 쓰고 같이 먹고, 같이 다니고 공부도 늘 같이했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큰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공부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사람이 피곤하고 지칠 때쯤 되면, 늘 무슨 이상한 시 같은 것을 소리 높여 외우는데 알고 보니 히브리어였습니다. 궁금해서 그것이 무슨 시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시편 23편이라고 했습니다. 왜 피곤해지고 집중이 안 될 때 그 시를 외우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이 시를 외우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이 느껴지고 마음도 가벼워지며 정신도 맑아지고 자신이 알 수 없는 힘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날부터 그도 그 친구에게 배워 시편 23편을 같이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친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1, 2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두 친구는, 공부하다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소리 높여 외웠습니다. 나치의 핍박이 점점 심해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만 했는데 어느 날 급하게 연락이 왔습니다. 지금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쳐 자신도 잡혀서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자전거를 타고 은신처로 달려갔습니다.

눈물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이미 친구를 태운 차가 마을에서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트럭을 뒤따라 가면서 친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갑자기 트럭 옆으로 친 포장을 들치고 그 친구가 고개를 내밀었는데 눈물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인 친구의 얼굴은, 놀랍게도 싱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갑자기 소리 높여 외우기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아무 걱정 없던 그때와 같이 평온한 얼굴에 미소 띤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을 흘렸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친구의 얼굴을 보며 같이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편을 외우고 있는데 어느새 차는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고 그것이 친구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일의 패색은 더 짙어져서 나치는 최후의 발악을 하기 시작했고 그도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의 전장에서 패전하여 포로로 잡혀서 총살을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대열에 끼여 걸으면서, 젊은 독일군 포로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갑자기 가스실로 끌려가면서도 웃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그 친구처럼, 나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어느새 형장에 도착하여 동료들이 하나둘씩 총알에 쓰러지고,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형 집행관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고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도 시편 23편을 조용히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 순간 왠지 알 수 없는 힘이 밀려왔습니다. 용기가 생겼고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자신을 겨눈 총구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장을 지키고 있던 연합군의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는 목소리를 높여, 같이 시편 23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히브리어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유대인이었던 연합군 장교는 곧바로 그를 풀어주라고 명령했고 사형 중지 서류에 사인했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장교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교수님이 그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형장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고 싶다는 자신의 그 마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놀랐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주셨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부르시면 저 천성을 바라보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음을 믿으며 예수 안에서 숨을 거둘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207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하늘의 사람, 요셉 박승남 2020.07.26 0 792
다음글 납달리와 베냐민을 향한 축복 박승남 2020.07.12 0 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