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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사람, 요셉 박승남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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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50:14-26절 개역개정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22.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26.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0:14-26 하늘의 사람, 요셉

 

그처럼 욕심도 많고 야심도 컸던 야곱도 결국 죽었습니다. 장자가 되고 싶어서 형을 속인 것을 비롯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본 사람, 야곱이 결국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 남은 것이란 무엇이 있을까요? 그의 사랑하는 아내도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갔고, 그가 탐내고 욕심부리며 살았던 모든 것도 다 없어진 채 그는 하나의 미이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야곱의 마지막처럼 적나라하게 죽음의 실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그의 유언입니다. 그의 유언은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자기를 조상의 묘에 묻어달라고 한 이유는 자녀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잊지 말고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무엇의 충고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화려한 상여 행렬을 이루며 가나안으로 가서 거기에 아버지를 장사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음이 타는 사람들은 바로 그의 형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해서 옛날 자신들이 저지른 악한 일에 대한 보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아버지가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는데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고 거칠 것 없으니 이제 뭐가 걸림이 되겠는가? 요셉이 칼을 빼 들어 앙갚음하면 이제 자신들은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형들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이 상처를 주고받는 데는 5, 10분밖에 안 걸리지만, 그 상처가 치료되는 데는 10, 20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원수 맺은 감정이 풀어지는 데는 몇십 년이 걸리기도 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용서받는 데는 평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남북의 사정이기도 합니다.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린 지 39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기들이 행한 죄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다 용서했는데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을 용서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을 가진 형들은 가짜 유언까지를 만들어서 요셉에게 보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16~17) 이 말을 전해 듣고 요셉은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속상해서? 분해서? 아니면 형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요?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형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한 점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또는 형들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처럼 받고자 하는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신체 구조에 이상 현상까지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슴 저리게 아픈 것은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데도 그 사랑을 받아 주지 아니하고 거부당할 때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거부하는 아들을 둔 부모처럼 불행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리 진실된 사랑을 주려고 노력해도 이를 거부하고 잘못된 길로 나가는 친구나 이웃을 둔 사람의 마음처럼 쓰리고 아픈 가슴이 있을까요? 그런 면에서 가장 마음이 쓰리고 아픔을 겪으셨고 지금도 겪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하셨는데 그 사랑이 수많은 이들에게서 외면, 무시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종교적 열심히 있는 이들 가운데서도 그러하니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마음은 그야말로 몹시 분하고 심한 상처로 쓰라리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크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그 사랑 속에 살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보여주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랑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유언장을 꾸며서까지 자기들을 용서하라 하는 형들을 볼 때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요!

그런데 요셉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형들은 우르르 요셉을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엎드려 있는 형들을 보면서 요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려서 꾸었던 꿈, 형들의 이삭 단이 자기의 이삭 단 앞에 머리 숙여 절하던 그 꿈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꿈의 완전한 성취, 거기서 요셉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자기를 향한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인도하신 분은 자기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꿈대로 자기를 인도해 온 것입니다.

요셉은 알았습니다. 형들의 음모와 요셉의 불행,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도리어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이것을 분명하게 느낄 때만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용서의 생활은 인간이 기본이 될 때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단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갈 때만이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용서는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2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여쭙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천국은 어떠한가를 비유로 말씀하여 주시는데 바로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주인이 애걸하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가엾게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는데 그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빚 독촉을 하였고 그 동료가 엎드려 간청함에도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한 못된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인이 그를 불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고 하시면서 결론으로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 일만 달란트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으로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로 불쌍히 여겨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불쌍히 여겨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로는 단순하지만, 이러한 용서를 위해 우리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 구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놀라운 은총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주님의 그 크신 용서의 은혜가 뭐가 되겠습니까? 그 은총을 헛되이, 무로 돌려버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진정 주님의 사랑에 감격한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사랑, 주님의 용서하심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얻게 됩니다. 또 날마다 살아가면서 짓는 죄도 십자가 지신 예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그 모든 죄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끝까지 승리하였습니다. 완전한 용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은총, 사랑을 깊이 경험하였기 때문이며 그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한 원천입니다.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가 그처럼 욕심껏 차지하려고 한 것들을 다 이 땅에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것 중에 위대한 것 중의 하나는 그의 유언이고 또 하나는 그의 신앙의 유산을 이어받아 지켜가고 있는 아들 요셉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요셉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 야곱의 생명은 이어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요? 아니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요? 야곱의 생애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꿈, 그리고 신앙의 유산만 영원한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자녀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심어주고 있습니까? 부모들의 잘못된 신앙으로 상처를 안고 잘못되어 가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이 될 수 있을까요? 부모들이 보여준 잘못된 교회관이나, 잘못된 신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바른 하나님 관을 정립할 수 있을까요? 잘 믿어야 합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고, 그리고 관 속에 담겨 땅속에 들어가도 이 땅에서 힘차게 숨 쉬며 뻗어 나갈 신앙의 유산이 자녀들 마음속에서 힘차게 약동하며 뻗어간다면 이보다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야곱, 요셉과 같은 사람의 생을 말할 때 파란만장의 생애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러나 요셉도 파란만장의 세월을 보낸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도 요셉은 이 말을 그대로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통을 당할 때 아픔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닥쳐온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활동 기회였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산 세월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고난과 동시에 기대와 흥분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대와 흥분 속에서 보내는 신앙과 원망과 짜증, 그리고 불만으로 보내는 신앙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요셉을 인도한 희망의 별은 항해사들이 바라보며 바다를 가르던 샛별같이 빛나던 그의 꿈이었습니다.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자기가 묶은 곡식 단에 모두 절했던 꿈, 그래서 형들이 "네가 우리 왕이라도 되었단 말이냐?"고 꾸짖었던 꿈, 그리고 해와 달과 열 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던 꿈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꿈이라면 그의 인생은 결론이 나 있는 삶이었습니다. 결론이 나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과정이야 어떻게 진행되던 간에 결과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모두 미래를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이 캐나다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살 때, 그는 인생의 허무와 무가치의 절망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때라고 합니다. 그 시기에 쓴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울 때라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사랑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일이며, 둘째는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요셉이 붙들고 산 신앙이라고 생각됩니다. 히브리서 116절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안고 온 세계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 요셉은 본문 20절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으니"

아버지에 이어 인도 선교사로 수고했던 데이빗 시멘즈는 그의 저서 [좌절된 꿈의 치유]에서 5020절의 요셉의 고백을 50-20 환상이라 명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더없이 암울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배후에서 일하시고 동시에 일상적인 삶과 관련된 개인적인 사소한 일 가운데도 하나님은 계시고 일하시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50-20환상 즉 악까지도, 불행까지도 바꾸셔서 위대하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형들로 인하여 이루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828절을 보면 사도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해하려고 행해진 여러 일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시어 결국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려 했던 자들까지도 돕고, 살리는 쪽으로 인도하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적인 악이 바로 하나님이 그들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함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쓰신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실패와 죄악과 결점, 깨어진 꿈들, 상처받은 감정들, 예기치 못한 사고들, 비극, 괴로움, 고통, 불합리하게 보이는 일 등,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하거나 근심, 염려하거나 미움과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의 사람 요셉은 이집트에 머물러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고,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까지도 요셉이 자기의 자식으로 길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 덧 그의 나이 110세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가족들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렀습니다. 이때 형 중에는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요셉은 가족에게 유언합니다. 나는 죽으나요셉도 마침내는 죽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다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죽음이 똑같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죽음도 독특할 수 있습니다. 의인 요셉의 죽음에는 슬픈 빛이나 무서운 빛이 없습니다. 그의 죽음을 맞는 태도에는 어린이처럼 천연스러운 맛이 있습니다. 뉴콤 대령은 자기의 운명을 알리는 조종 소리를 듣자 갑자기 머리를 들고 미소와 함께 "" 대답을 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자기 이름에 기립하여 대답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죽음에 대한 초연한 태도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고락 간 하나님께 순종한 경험에서 얻은 신뢰의 성숙함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있다지만 평소에 하나님과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죽음 앞에서 이처럼 태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요셉은 가족, 후손들을 염려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이어서 25절에서도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온 가족에게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돌보아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그들에게 주지시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어서 요셉은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맹세하게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의 사람 요셉의 일관된 자세는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을 바라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음, 그리고 장래에 대한 소망 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그는 죽는 순간에도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총리가 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을 때에도 그는 주님 안에서 귀한 비전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그의 믿음의 비전대로 훗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의 육신으로는 가나안에 다시 가지 못하였지만, 그의 유언은 이루어졌습니다. 출애굽기 13:18~19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그리고 여호수아 243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이 형제들에게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에 자신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 달라고 한 것은 어렸을 때의 땅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철저한 신앙 교육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향 하면 요셉에게 가장 강력한 기억은 소름이 끼치는 불행한 과거의 추억일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 중에 가장 강력한 것들은 자기가 받았던 심적 고통인데 형제들에게 배반 받고 애굽의 노예로 팔려온 그 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고향으로 자기 식구들에게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뼈도 그곳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평안의 날에 그곳에서 안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안주가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안주하기를 원하는 형제들에게 그곳에서 안주하지 말고, 조상의 하나님, 조상의 땅, 그리고 조상의 믿음으로 돌아가도록 권고한 것입니다. 요셉이 마지막까지 조상의 땅을 기억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조상들의 신앙에 충실하려고 했는가를 보여주는 면입니다. 요셉은 당연히 애굽에서 화려한 장례식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촐하지만, 고향 땅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노예로 팔렸을 때도, 노예에서 다시 깊은 감옥으로 떨어졌을 때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고, 마음의 자세가 흔들림이 없습니다. 마치 고난 앞에 서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정확하고 바르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파도타기입니다. 파도가 잔잔할 때도 물결은 흔들립니다. 심하면 배가 뒤집힐 듯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이 그 배의 주인이십니다. 또한, 선장이시며 사공이십니다. 찬송 432장입니다.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 입 벌려 달려드나

이 바다에 노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그 배 안에 주님이 계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한 우리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4:4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오직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사람 요셉처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아름답게 인생의 길을 항해하시다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요셉처럼 소망 가운데 귀한 유언을 남기고 주님께로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7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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