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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그리고 복음 박승남 20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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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1-4절 개역개정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1~4 노예 그리고 복음

 

혼돈된 시대, 한국교회의 위기의 시대, 코로나로 인해 영적으로 흔들리는 시대, 또한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 다음 세대가 염려가 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를 묵상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볼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지만 특히 로마서를 대할 때도 당시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즉 일차적으로 어떠한 배경속에서 누구를 위해 서신을 기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할 당시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싶어 로마로 가고 싶고 또 한편으로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아시아, 마케도니아, 아가야의 이방 교회들로부터 모은 구제헌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대표들에게 일임할 수 있었지만 이 헌금을 통해 그동안 세워진 이방교회들과 예루살렘의 교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고 연합과 친교를 공고히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민하다가 그는 고난이 예견되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하고는 대신 편지로 로마의 성도들을 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편지로 로마로 더 나아가 스페인을 가려는 마음을 밝혔습니다. 터키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으로 해서 포르투갈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 바울의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눈으로 볼 때 로마는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도시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를 통해서 스페인이라고 하는 말은 로마가 앞으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근거지라는 안목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로마교회였습니다. 로마교회가 바로 되지 않고는 다른 교회는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마음은 급해졌습니다.

그러면 로마교회들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성서학자에 의하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에는 작은 규모의 교회가 적어도 다섯 개가 있었다고 봅니다. 제일 큰 교회가 50명 정도 모였을 것으로 보고 3020명 정도의 우리로 말하자면 개척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제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서, 어떤 필요 때문에 집에서 시작이 됐기 때문에 상호 간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이 다 달랐습니다. 또 그들의 신앙이 다르고 하나님의 예배하는 방법이 다르고 이게 로마교회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로서는 이 로마교회들의 형편을 알고 나서 편지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느냐? 그리고 바른 기독교의 신앙 위에 세울 수 있느냐? 그래야만 로마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에 주시는 시사점이 큽니다.

그러면 이 로마에 있었던 소그룹 교회들은 누가 세웠을까요? 모릅니다. 베드로가 간 적이 없고, 사도들이 간 적이 없고 바울이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선가 신앙을 배워 가지고 온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고 또 다른 데서 신앙을 배워 온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일성을 이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성격이 다 다르게 됩니다. 그런 데다가 주후 49년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졌어요. 당시 로마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유대교에 머물러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정부가 보기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소중히 여기는 팍스 로마그 평화를 깨는 사람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를 구분을 못 했으니까 유대인이면 무조건 다 쫓아낸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교회에는 이방 크리스천들만 남게 된 것이죠. 상상을 해보세요. 이방 크리스천들은 구약의 배경을 전혀 모릅니다. 기독교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이제 로마서 118절부터 가 나오는데 그런 이방의 죄에 물들여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그냥 그 생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후 54년에 네로가 황제가 되고 그 귀향 갔던 크리스천들을 돌아오도록 허락을 해줘서니까 점차 로마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훈련된 크리스천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기는 하는데 이게 교회가 아닌 거예요. 물론 이러한 사실을 바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사정을 알게 된 바울은 이런 로마교회를 바른 신앙 위에 세워야 할 필요성을 쓴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여러분 다섯 개 교회가 이 유대인들이 점차 점차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이 다섯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수는 이방 크리스천입니다. 유대인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주도권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가 추방당한 후에 이방 크리스천들이 주도권을 잡았고 몇 년 뒤에 점차 돌아오게 된 유대 크리스천들은 힘이 없고 여기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된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첫째는 이방 크리스천들과 유대 크리스천들의 갈등, 산발적으로 세워진 소그룹 교회들이 문제성, 아직 신학이 확립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게 이교도인지 기독교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 있는 로마교회들을 향해서 바울은 편지를 써야 했다는 것이죠.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게 뭐냐면 신학의 확립입니다. 바른 신학을 이 그룹교회들이 공유함으로 통일된 신학을 가진 신앙을 가진 로마교회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초한 바른 신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저런 유혹에 흔들리고 주님과 별 상관없는 친목 단체가 되거나 이단 사이비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방 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 하나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 그러면서 각기 갈라졌던 교회들이 서로 유대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하도록 하려고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죠.

물론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 중에 중요한 동기는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교회의 하나 됨, 그것은 바른 신앙과 겸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힙니다.

 

1절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렇게 나와 있죠? 그런데 원어 성경에는 파울로스 둘로스 그리스도 예수 그러니까 영어로 말하면 “Paul, a servant of Jesus Christ” 바울 나는 노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매끈하게 하려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이라는 단어가 희석돼버려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둘로스라는 말 즉 나는 노예다!” 하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바울이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 명함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바울 그리고 밑에다가 노예 이렇게 썼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의 노예냐?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다라고 써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로마서에서 자기를 노예라고 소개할까요? 물론 바울 서신에서 자기는 종이라고 하는 말 많이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노예라는 말 강조해서 쓴 책은 로마서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심으로 자신이 주님의 노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미국 남부에서 한 농장 주인이 노예를 몇 명 사서 집으로 끌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노예가 아주 성질이 거칠어 반항했습니다. 죽일 테면 죽이라고 대들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죽여 없애 버리겠다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사정없이 노예의 목을 찔렀습니다. 노예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곁을 지나가던 목사가 영겁 결에 맨손으로 그 칼을 움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의 손이 엉망이 되는 대신 노예는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사는 노예 주인에게 이 노예를 자기에게 팔 것을 부탁했습니다. 주인은 기꺼이 동의했고 이 노예는 목사에게 이끌려 집으로 갔습니다. 주인이 바뀐 것인데 놀라운 사실은 그 목사님은 이 노예의 결박을 끌러 주고 자기 목욕탕에서 목욕을 시키고 자기의 옷을 입혀 주고 함께 식탁에 앉게 하며 자기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게 했습니다. 이 노예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은 분명했습니다. 내가 자네를 우리 집에 데리고 온 것은 노예로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형제로 함께 지내기 위함일세. 안심하고 나하고 같이 살게나" 그러나 흑인 노예는 그 주인의 자비와 사랑이 너무 놀랍고 감격스러워 목숨 바쳐 주인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종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기까지 하신 주님은 우리를 사납고 잔인한 사탄의 결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형제로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하늘나라의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지며 영원히 함께 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 감히 형제라 부르지 못하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 충성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주를 위해 나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드리며 살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는 다섯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노예는 자기 계획이 없고, 자유가 없어요 자기 소유가 없어요. 자기주장이 없고요 일을 해서 어떠한 성과를 얻거나 영광스러운 일이 생겼다면 그건 자기 것이 아니고 다 주인의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예수님의 노예라 한 것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내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영국의 천재라고 하고 소설가이자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평신도였던 CS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 나니아 연대기 등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려서는 교회를 다녔는데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서 예수를 버리고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갈망에 붙들려 인격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성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때 루이스는 내가 사냥개한테 물렸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루이스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천국의 사냥개라 일컬었습니다. 사냥개가 끈질하게 사냥감을 추적하고 물고 놓치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끈질기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국의 사냥개가 예수님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집요한 추격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사람이 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기꺼이 저분의 노예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난 사람은 예수님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외에는 이 땅에 어떤 소망도 없고 어떤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루이스나 하나님이 사랑에 항복하여 기꺼이 그분의 노예로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는 노예라고 소개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사회가 노예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로마에 노예가 어떤 학자들은 로마시민의 4분의 1이 노예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2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에 있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바울은 나는 노예다 하는데 이게 바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전 말씀드린 CS 루이스에 대해 서양에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분 한 사람으로 인해서 서구에 500만 이상이 크리스천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CS 루이스는 마지막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자기가 정말 위대한 학자인데 그걸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노예가 됐더니 자기가 포기한 것보다 엄청난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

물론 바울은 CS 루이스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입니다. 바울은 유대 대학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하면 바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을 만큼 유대 땅에 대 율법 학자 신학자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산헤드린 공의회원이었습니다. 또 위치적으로는 안수받은 랍비 서기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변호사 검사 판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바울은 유대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이나 영화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는 노예다. 그럴 때 이게 받는 사람이 얼마나 충격적이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자신을 노예라고 하냐 말이죠.

여러분 바울이 나는 노예다.그러면 반드시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누구의 노예냐? 그러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다라고 하지요.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낮아지면 됩니다. 나를 나타내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교회가 죽고 내가 낮아지면 그리스도가 살고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 그러니까 “Paul, a servant”라는 단어 하나로 바울을 굉장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인이 누구냐? 그러니까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어서 사도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인데 특별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 부름심이라는 단어와 택정함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두 단어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택정함이 먼저인가요? 부르심이 먼저인가요? , 택정함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말할 때 택정함이라는 말보다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먼저 사용할까요? 순서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택정하시고 부르셨다라고 해야 되는데 나를 부르시고 택정하셨다고 쓰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자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어요! 그런데 택정, 예정한 줄을 어떻게 알까요? 부르심을 통해서 택정함을 받은 걸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 부름을 받기 전에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을 아셨나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셨나요? 아무도 몰랐지요? 그런데 나같은 사람도 부르시는 걸 보고 아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셨고 태초 전부터 나를 택정하고 계셨구나라고 느껴지는 이게 바울의 신앙고백이고 또한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택정이라든지 예정이라든지 이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할 때 아! 이분이 나를 언제부터 알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아셨어! 그러니까 바울의 사상에서는 예정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하면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처음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나왔지만, 이 말은 로마서에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목사로 불렀든 농민으로 불렀던, 교사로 불렀던, 사업가로 불렀던 교회 일꾼으로 불렀던 무엇으로 부르셨든지 중요한 것은 나를 부르셨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예정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미리 아셨다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다고만 하면 되는데 왜? 굳이 택정함이라든지 예정이라든지 하는 말을 했을까요?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이 유대인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쓴 책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유대인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까요? 하나님이 당신들을 부르셨으니까 당신들도 택정함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걸 보면 태초부터 나를 아셨고 나를 깊이 사랑하셨다는 것이니까 이것을 깨닫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태초부터 아시고 택하여 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어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준비시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길러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자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데 복음이 뭐냐를 2절에서부터 설명해나가요. 같이 읽어 보시지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데 복음이 뭐냐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복음은 어떤 내용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2절 마지막에 보면 아들에 관하여라고 하잖아요. 아들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설명하는데 이 아들에 대해 2~4절까지 다섯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 세 번째죽은 자들 가운데서 죽으셨다 네 번째 부활하셨다. 여러분 죽은 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물론 우리도 주님을 따라 그 언제가 부활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데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말하지 않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부활함으로 봐라!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입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이 다섯 가지에 하나를 더하여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때 항상 뭘 강조하냐면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계신 분이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사신 그리스도,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리고 장차 다시 오실 분 등으로 다양하게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에만 관심을 두는 동안, 예수님의 생애나 교훈을 통해서 주신 소중한 유산들과 그 의미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당연히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실만 강조하게 되면 구원에 집착하게 되고, 복음의 관심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만 국한됩니다. 십자가와 부활만 강조하면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는 심각하게 묻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고만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과 어떻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자체가 소중한 것입니다. 그 삶이 있고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빼버리다 보니까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고 하는데 믿음에서 삶이 없어지면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항상 삶을,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중요한 것은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복음에 대하여 좀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는 주님의 노예라는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8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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