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됨과 기도 박승남 2020-08-09
  • 추천 0
  • 댓글 0
  • 조회 809

http://areumdaun.net/bbs/bbsView/34/5778154

[성경본문] 로마서1:4-10절 개역개정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4~10 믿음과 순종, 하나됨과 기도

 

 

작년에는 폭염이 그리고 올해는 폭우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모든 원인을 기후변화, 지구온난화와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니 기후위기(climate emergency)와 지구가열화(global heating)라고 바꾸어서 말해야 한다고 하지요. 게다가 태풍 장미까지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 바라보고 산 사도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은 분리하여 따로 두다란 뜻을 가졌는데 사도로서 과거에 어느 순간에 사도로 선별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를 알고 계셨으며 자기를 선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더구나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자신을 사명자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라웠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그 감격, 그 감사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자기를 사랑하시고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 항복하였고, 그 사랑에 정복되어 기꺼이 주님의 노예로 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는 3~4절에서 자기가 섬기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복음이기도 합니다.

3절을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하고 4절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합니다. 여기 육신과 성결의 영은 정반대의 의미가 있는 표현입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성결의 영, 거룩의 영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결하신 성령 안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성결하신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사셨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성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로마서 6~8장까지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5절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미 1절에서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5절에서 다시금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도의 직분을 누구에서 받았다고 하나요? 그로 말미암아 즉 참된 인간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물론 은혜, 은총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 전권대사, 사신입니다. 여러분 각 나라에서 왜 외국에 대사, 공사를 보내고 사신을 보냅니다. 대사는 특명전권대사의 준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바울을 왜 사도, 대사로 파송하신 것일까요?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표준새번역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이방 사람으로 하여금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공동번역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믿어서 순종하게 하려고, 하느님을 믿고 복종하게 하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복음을 전하는 직분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잘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고 믿어 순종하도록까지 하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는 로마서가 믿음이라는 기둥 순종이라는 두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로마서를 대하면서 순종이라는 기둥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믿음이라는 기둥을 1장에서 4장까지 다루고 5장에서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순종의 기둥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순서입니다.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 강조했습니다. 나는 종교개혁을 하려고 한 게 아니다. 오직 믿음의 순서를 바로 놓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순종이라는 순서!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야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4절을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말씀하지요. 여기에 루터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받으실 때 아벨을 먼저 받으셨냐? 제물을 먼저 받으셨냐? 뭘 먼저 받으셨지요? 아벨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벨을 먼저 받으셨다는 것은 아벨의 믿음을 보고 받았다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말이죠. 자 그러면서 또 하나 물어요. 하나님께서 아벨이 제물을 바치지 않았는데도 아벨을 받으셨을까요? 어때요? 그건 아니겠죠? 그러니까 여기서 믿음은 아벨 자신이고 순종은 그 제물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보고 아벨을 받으셨다고 하면 순종 즉 행위로 구원받는 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먼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과 함께 동시에 중요한 게 뭐냐면 이 아벨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제물을 순종이라고 단어로 풀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삶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그걸 믿음으로 받으셨겠느냐는 거에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루터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 믿음은 순종이 반드시 따라와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믿음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존경하나요? 아니면 말하는 믿음대로 살고 있으니까 존경하는 것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믿음만 이야기하고 삶이 없었습니다. 신앙이 아주 좋은 것 같은 크리스천들이 위선적이고 정직, 진실하지 못하는,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는 것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순종이라는 단어는 로마서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맨 마지막에도 나옵니다. 로마서 1626절을 보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특별히 10장에 가서 왜 유대인들이 선택받았으면서도 실패했냐는 말씀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03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자 이렇게 보면 로마서는 교리 책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소개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삶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쓴 서신이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하고 로마서 맨 마지막에도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마칩니다. 로마서는 이만큼 교리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너희는 누구고, 그들은 누구일까요? 여기서 너희는 이방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 크리스천입니다. 사도바울이 서신을 쓸 때 로마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희 그들로 구분하지만 7절을 보면 구분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그러니까 로마교회에 다수인 이방인이 있고 소수인 유대인이 있는데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 사도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 크리스천 그리고 이방인 크리스천까지 모두 다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도 하나님의 택정함 이미 오래전에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불러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여러분 우리는 함께 주님을 섬기면서도 때로는 마음이 나누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오해와 갈등으로, 서로 간의 부족과 허물로, 사탄의 공격으로 분열하고 등을 지고 불편하게 지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에베소서 44절을 보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28절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한 시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로마교회도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었는데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면서 이런저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 된 형제자매, 가족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성도들 간에 갈등하고 등을 지고 미움이 싹트고 불신과 오해가 일어나 분열된다면 좋아할 것은 원수 마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잘못했을 때 솔직히 시인하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성 프란시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걸식수사단을 만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되는 것을 모두 버렸습니다. 이리저리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성 프란시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잘 곳이 필요했고, 머물 곳이 필요했습니다. 어느 날 빈 헛간이 있어서 그곳에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고 여장을 풀었습니다. 조금 있자니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프란시스가 나가보니 헛간에 임자가 찾아와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헛간을 쓴다고 야단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프란시스 제자들은 흥분해서 아니 쓰지도 않는 헛간인데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하루쯤 지내는데 뭐가 그리 말이 많냐 하면서 항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루쯤 어디에서 잔들 어쩌겠는가? 주님께서 우리가 잘 곳은 또 마련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지고 싸움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요,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흙의 먼지를 떨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하고 어떤 것도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어느 성도는 믿음이 아직 약한 교우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돌볼 때 하나님께서 기쁘다 하실 것이라고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8절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상대방 편지 받는 자들의 장점 칭찬을 할 것은 찾아서 칭찬해주는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통해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좀 과장된 표현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아직 조그마해서 선교 못 해요. 전도 못 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조그마한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이야기를 할까요. 물론 로마 교회를 통하여 복음 전파가 이뤄지고 있었겠지만, 이것은 바울이 바라는 미래의 비전, 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로마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퍼져나갈 환상을 보고 있다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역사를 보면 바울의 이 꿈이 이루어졌잖아요? 그래서 결국 초대교회가 로마를 정복했고 이 복음이 영국으로 가고 미국으로 가고 그래서 복음이 우리나라로 오고 우리나라에서 온 세계로 흩어지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인이 얼마 안 되어서, 재정이 얼마 안 되어서 못한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교회에 선교 비전을 주신 것은 자립대상교회 즉 다른 교회에 지원을 받을 때입니다. 도움을 받는 처지였는데 누구를 지원해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제 마음에 감동과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19961229일 공동의회에서 매월 20,000원씩 240,000을 해외선교비로 사용하기로 의결하고 971월부터 선교헌금을 작정하여 실시하여 중국에서 선교 활동하는 송영수 선교사님을 지원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91월부터 용연교회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홈페이지 교회 연역을 보면 잘 나옵니다. 앞으로도 더욱 선교후원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9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로마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뭔가 잘못되어 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서 권고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가슴이 타고 돕고 싶은 마음 이것이 성령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어야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들끼리는 서로 간섭할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왜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에 속했기 때문이며 같은 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내 생활에 간섭하지 마라. 내 신앙은 내가 지킨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ABC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잘못되어 가는데 어찌 권고하지 않을 수 없고 어찌 돕지 않을 수 없습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목사도 성도도 아닙니다. 이게 없는 교회라면 마치 핏줄과 신경이 다 잘려 버린 몸뚱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 내 심령으로 섬긴다라는 말을 썼습니다. 심령이라는 단어는 퓨뉴마로 숨, 영혼이라는 뜻도 있고 성령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말하고 성령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섬긴다는 말은 후에는 예배하다’(99, 10:2)라는 뜻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칼빈은 심령으로 섬긴다는 말에 강조점을 둡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의 심령을 외형적인 경건의 모양과 대조시키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인 체하고 겉으로만 그렇게 하므로, 그는 그가 심령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증거한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이라고 복잡하게 수식하는 이유는 분명 로마 교인들의 예배하는 자세에 뭔가 잘못된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암시적으로 그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들을 강조해서 쓴 것입니다

이방 그리스도인은 극도로 타락한 로마 문화와 우상숭배에 젖어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의 생활 태도는 크게 변화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예배드리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방인이 주체가 되어 드리는 예배에는 이방 신을 섬기던 모습이 깊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지도 못했고, 그러므로 자연히 예배드리는 형태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남미(South America)나 소아시아를 방문해 보면, 그들의 신앙이 미숙하기도 하지만 토속신들을 섬기던 자세가 그대로 예배에 배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교회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가요? 진정 영과 진리로 성령 안에서 말씀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인가요? 아니면 내 감정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만 즐기고 가는 그런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닌가요? 바로 이런 예배가 이사야 선지자 시대의 예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그렇게 예배하는 하나님께서 증인이신데 무엇에 대해서요? 항상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입니다. 그 기도는 두 가지인데 1)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2) 너희에게 찾아갈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사로잡힌 사도바울은 감사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절과 같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말한 대로 그는 항상 기도하며 사는 일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해 주는 것일 것입니다. 서양 격언에 부모가 눈물 흘린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위대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아우구스티누스 뒤에는 눈물 흘리며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가 있고, 유럽을 성령의 불로 뒤흔든 부흥사 웨슬레 뒤에는 그 어머니 수잔나의 기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의 뒤에는 어머니 한나의 기도가 있었고, 경건한 목회자 디모데의 배후에는 그 어머니 유니게의 기도가 있었으며,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배후에는 그 어머니 요게뱃이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사도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그렇게도 당부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식은 행복한 자식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을 둔 목회자는 행복한 사역자입니다. 문득 생각날 때 한번 해주는 그런 자선의 기도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과 같이 끊임없이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을 가진 사역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과 같이 끊임없이 성도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역자를 가진 교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역자가 계속해서 기도해 주는 로마교회는 얼마나 복된 교회입니까?

우리는 서둘러 실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나의 신앙생활은 사면초가와 같이 불신의 가정과 불신의 형제자매로 둘러싸여 어디에 기도 한번 호소할 곳이 없다고 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바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기 바랍니다. 그는 친히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상처받은 손과 옆구리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내놓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로요 격려요 용기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깜박깜박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주님 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살다 보면 피곤하고 약해지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며 외로울 때가 왜 없겠습니까? 눈물의 골짜기를 더듬으며 나를 도와줄, 내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고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을 두루 살필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이며 용기이며 기쁨이겠습니까?

또한, 성령께서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안팎으로 위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믿고 이 험한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상호소통과 빚진 자 박승남 2020.08.16 0 705
다음글 노예 그리고 복음 박승남 2020.08.02 0 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