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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소통과 빚진 자 박승남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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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9-15절 개역개정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9~15 상호소통과 빚진 자

 

18854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한 미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하나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에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을 것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시간, 예배당도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기도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19세기 말 조선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선교 초기에 그의 눈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메마르고 가난한 땅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어둠이었고, 사람들은 고통이 고통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 남자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고,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접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야말로 막막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하나님께 순종을 약속했고, 주님이 펼쳐주실 미래를 기대했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어두운 조선의 땅이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30, 60,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고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하여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이가 되었습니다(12:3).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께서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 독립이요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김구 선생의 고백입니다. 김구 선생은 물론 그의 부모 그리고 그의 자녀 손들 모두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김구 선생의 손녀 김미 집사는 어머니로부터 할아버님께서 늘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소릴 듣곤 했다며 어릴 적 기억을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김신 선생은 오늘 우리가 광복 몇 주년을 이야기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는 분단 몇 년을 맞이한 것이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진정한 나라 사랑을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은 1949년 봄 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에서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봅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감사와 기도의 사람 사도바울도 로마서 91~3절과 101절에서 밝히는 대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도록 위해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는 여러 교회 그리고 로마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9~10입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그리고 11절에서는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서신을 읽게 된 로마 교회 성도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마 로마 교회의 교인들은 이 편지를 읽어 나가는 동안 바울의 따뜻한 가슴을 느꼈을 것이고, 동시에 그가 전하는 복음도 친근한 마음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한다는 것은 자기의 기도 가운데서 로마 교회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 교회를 사랑하고 또 그곳 교인들을 보기를 갈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힘쓴 분들 역시 조국을 사랑하고 해외에 계시면서 활동했던 분들은 얼마나 조국 보기를 갈망했을까요? 해방되어 돌아왔을 때 조곡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은 춘다 라고 노래할 정도로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를 네 번이나 강조하는데(1:10,11,13,15) 그처럼 가기를 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11절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렇게 보면, 그가 로마에 가고자 한 이유가 단순한 열정만이 아니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은사는 은혜의 선물로 원어로는 카리스마입니다. 어떤 은사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은사를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교회를 섬기는 은사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적인 체계도 세워지지 않아서 옛 모습 그대로 사는 그들에게 은사만이 선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신령한 은사란 말은 심령으로예배한다는 말과 연결 지어 해석한다면 좀 더 폭넓은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지고 가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령한 은사어떤 신령한 은사’(some spiritual gift)로 이는 아직 로마 교회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입니다. 아직 로마 교회는 신앙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배도 우상을 섬기던 자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고, 믿음에서 순종의 단계로 옮겨 가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교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바울이 가서 신령한 은사(cavrisma pneumatikovn)를 나눔으로 로마 교회가 견고하게 되길 원했습니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확실히 하다’, ‘세우다또는 굳세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바울 자신이 이 은사를 나누어 주어 로마 교회를 견고하게 세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나누어 주는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든든히 세워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을 불러 고별 설교하는 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32절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든든히 세워주십니다. 성령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의 통로로서 자기가 받은 것을 나누어 줄 뿐, 근본적으로 은사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오. 견고케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말씀, 복음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주십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은사는 어떤 특별한 성령의 은사도 포함하지만, 앞으로 전개할 로마서의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교훈이 영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어서 12절을 보면 바울은 로마에 가는 이유가 로마 교회만을 위한 게 아니라 피차 위로를 받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너희와 나의 믿음(Both yours and mine)으로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고 한다는 뜻으로 직역하면 나도 너희와 함께, 너희 안에서 위로받고자 함이라 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고 또 뭔가 나눠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무엇인가 얻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기독교는 상호 소통의 종교입니다. 또한, 상호관계’(interactive relationship)의 신앙입니다. 주고받는 것입니다. 눠주고 받는 것을 영어로 share’ 한다고 합니다. ‘share'는 받는 것과 나누는 것을 모두 뜻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같이 신앙 생활하기에 주고받을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알기에 다른 사람보다 낫기에, 뭐 내가 소유가 많기에, 내가 특별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만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분으로 인해 느끼는 평안, 기쁨, 감사, 은혜, 복을 나눕니다. 말씀을 듣다가 읽다가 받은 은혜 등을 나눕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신앙이란 참으로 이상합니다. 나눠 줄수록 더 많이 받습니다. 더 많이 받았으면 더 많이 나눠줄 수 있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예수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거기 가면 로마 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니 그 소식을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가 있는 마을에 잘 사는 부잣집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는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이 아들만은 신앙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했는데, 하루는 월남으로 파병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집이 부잣집이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들이 월남에 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그런데도 월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그 청년은 월남에서 받은 월급을 고스란히 교회로 부쳐 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는 그 시골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무언가 봉사하고 싶은데 부모들이 믿지 않으니 도울 수는 없고, 그래서 전적으로 교회를 돕기 위해 월남에 간 것을 그 목사님이 알았습니다.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그 돈으로 종탑을 세웠고, 그 종을 칠 때마다 그 청년을 위해서 또 종소리를 듣는 사람 모두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종을 치는데 눈물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엎드려 그곳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우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종 줄을 놓고 땅에 엎드려 주님, 어찌하여 우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종아 지금까지 네가 흘린 눈물은 네가 흘린 눈물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내가 흘린 눈물이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며 살았습니다. 하루는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걷고 있는데, 평소에는 할머니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마을 사람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운다 했습니다. 누가 죽었느냐고 묻기에 할머니의 영혼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 슬퍼서 운다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내가 믿어 줄게, 울지 마라고 말하고는 그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온 가족이 다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청년의 가슴을 울렸고, 청년의 뜨거운 열정은 그 목사님의 울음보를 터뜨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울음은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눈물이 된 것입니다. 이분은 1977년 한신교회를 개척해 기장 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키시고 200577일 별세하신 고() 이중표 목사님이십니다.

 

여러분 참된 교제는 삼위일체로부터 시작됩니다.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이면서 동시에 세 인격이고, 세 인격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와 소통은 이 세상의 모든 교제와 소통의 모범이 됩니다(17:10, 2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도 소통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너희가 내 안에를 강조하셨습니다(154, 7). 동시에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도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113~4절은 이것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암이라(요일 1:3~4). 여기 두 번 나오는 사귐이란 말이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이는 상호교류, 교통, 교제, 분배, 우정이라는 뜻입니다. 축도에서 성령과 연결되어 언급되는 교통 하심이라는 단어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는 불통이 심합니다. 여야가 불통이고 진보와 보수가 불통입니다. 남북도 불통입니다. 교회는 어떠한가요? 진정 주님 안에서 거룩한 사귐, 코이노니아가 활발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 아름다운 소통이 이뤄지고 우리 성도들 간에서도 주안에서 사랑의 사귐으로 복된 소통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고, 로마 교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속했고, 로마 교회도 이방 사도인 바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의 소식은 바울의 기쁨이요, 바울의 소식은 로마 교회의 위로이기도 했고 동시에 바울의 걱정과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서로를 만나 보고자 하는 갈망이 있고, 자기들이 받은 복음과 은혜를 피차 나누기를 원합니다. 로마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 교인들 간에 소통이 막혀 있으므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그리스도 안에를 강조함으로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교회 간에 또 교인과 교인 간에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려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 로마 교회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가깝게는, 그가 가고자 했던 스페인에 복음을 전하는 전진기지로 로마 교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로마 교회가 견고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1절에 나오는 견고하게(1:11)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로마 교회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다는 암시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불안정하고, 특별히 교리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바로 정립되지 않아서 믿음의 삶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6l, 15). 그런데 로마 교회를 온 세상에 복음 전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서는 로마 교회가 신앙적으로 든든한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당시 모든 도로는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모든 바다도 로마로 통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고, 로마를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또 그런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비전은 몇 세기가 못 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교회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로마로 가는 일은 전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결국,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과정을 우리는 수요기도회에서 사도행전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특히 13절 마지막에 열매를 맺게 하려 한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의 비전과 그로 인한 열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즉 열매를 맺도록 하는 주체가 곧 바울이라고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약간의 열매를 얻고자 한다(some fruit I may have)라는 뜻으로, 열매를 수확하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에서는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것을 좀 거두려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결코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은 분명한 신학적 이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 맺게 하는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강조하신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강조하신 일차적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열매는 스스로 맺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54~5). 시편 13절의 강조점도 바로 열매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있습니다. 그리하면 열매는 스스로 맺는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718절 말씀대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남에게 빚진다는 것은 매우 괴롭고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남의 빚을 지고 고통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빚은 그것이 작은 빚이든 큰 빚이든 마땅히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 편히 다리 뻗고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빚진 자의 심정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기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빚을 갚는 데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싫어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빚은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합니다. 그런데 빚을 지고도 태연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빚진 자 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사도 바울은 그렇게도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빚진 자라고 하면서 자기가 빚진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그들은 헬라인과 야만인,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라고 언급합니다. 여기 야만인은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민족들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네 종류의 인종들은 과연 누구를 가리킬까요?

주석가 로버트슨(A.T. Robertson)성서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지혜의 주요한 강조를 지능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것에 두고 있다라고 합니다. 트렌치라는 분도 선과 분리될 수 있는 지혜는 없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헬라인과 야만인이 문명과 관계된 종족이라면,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는, 성경적으로 볼 때 선하다고 하는 자들이나 악한 자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네 종류의 인종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이 복음을 전해야 할 모든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방인이라고 해도 될 것을 이처럼 복잡하게 표현한 것일까요?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갈등하고 있는 로마 교회를 의식해서 한 말은 아닐까요! 바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당신들이 어느 곳 출신이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분들이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고, 나 바울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도입니다라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누구나 주님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기에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5)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믿는 자도 들어야 합니다.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최초의 복음 전도에 이은 후속 작업인 교육과 제자훈련을 가리키게 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은 최초의 전도 사업만이 아니라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일련의 활동 전체를 포함합니다. 그는 빚진 자로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로마에도 가서 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꿈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어 이뤄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사도 바울에게 베푸신 것보다 못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다 바울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주님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열심을 낸다면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빚은 안 지는 것이 좋지만 복음의 빚진 자 의식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빚을 졌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나라를 찾아온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님들에게 그리고 김구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 순국선열에게도 많은 빚을 졌습니다. 아울러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분, 교회로 인도한 분에게도 빚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빚을 갚으면 갚을수록 시원하고 은혜와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이 살아나고 소생하게 되고 은혜를 받고 민족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20208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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