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설교

  • 홈 >
  • 말씀 >
  • 주일 낮 설교
주일 낮 설교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 박승남 2020-08-23
  • 추천 0
  • 댓글 0
  • 조회 741

http://areumdaun.net/bbs/bbsView/34/5784792

[성경본문] 로마서1:16-17절 개역개정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16~17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

어떻게 해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을까요? 그야말로 자유가 넘치고 행복한 동산 에덴에서 멋지게 살 수 있었던 인간이 선악과에 집착하여 그만 범죄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지은 다음 뒤처리 문제였습니다. 죄를 범했으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면 좋았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핑계를 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벌을 선고하시고는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은 아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말씀을 주시고 또한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있던 저들에게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범죄한 저들의 눈앞에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실로 창세기 3:15절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은 예수님을, 입혀 주신 가죽옷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상처를 입으시고 죽기까지 하셨지만 그를 통하여 예수님은 옛 뱀인 사탄의 머리를 짓밟으셨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들에게 의의 옷, 생명의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외칩니다.

그런데 한때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니 몹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 이유가 신명기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게 했습니까? 자신들이 그리해놓고는 저주받은 사람을 믿는 이놈들은 얼마나 저주받은 사람들인가? 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멸족시켜버려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울은 자기 나름대로 토라(율법)를 지키기 위해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동분서주하며 복음을 믿는 자들을 체포까지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 빛으로 오신 주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 그리고 자기 같은 악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불러 주시는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복음을 부끄러워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에 갔을 때 고린도의 부유하고 찬란한 문화 또 이 고린도에 타락한 모습 등을 보면서 과연 이 복음을 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면서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고전2:3). 그런데 밤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8:10)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힘을 얻은 바울은 성령을 의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전2:2)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압도하는 고린도 문명, 그리고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고린도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도 그보다 말할 수 없이 우월하고 능력 있는 복음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18절과 같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기독교가 위축되고, 예배드리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혹시 복음을,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잘못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그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한편으로는 당시 로마 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그 넓었던 로마제국 전체의 기독교 신자가 5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라고 하는 도시안에는 겨우 몇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인들이 복음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복음은 능력이다.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 주의 십자가를 자랑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바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불신자도 들어야 하지만 신자들도 계속해서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소테리아) 이란 일반적으로 구출, 구원, 보존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나타내는 데에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대로 죽어서만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로마서를 통해 나타나는 구원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데서 출발하여, 영원히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다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굉장한 말입니다.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신다는 말입니다. 가난과 질병 가운데서도 우리를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것으로 끝났습니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먹어주시고, 고쳐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재난을 면하게 해주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시고, 저들이 살아갈 가나안 땅을 주시고 소망을 주셔서 넉넉히 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구원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샬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샬롬 안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 안녕' 등 말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무신론자 지성인이었던 이어령 교수가 2007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간증하자 그를 알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평생을 불신자로 살았거든요.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습니다. 1992년 딸이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96, 99년 두 차례 수술을 받았는데 재발하였습니다. 그 후에 망막이 손상돼 실명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어령 교수 부부는 딸이 살고 있던 하와이로 달려갔습니다. 눈이 안 보여 설거지도 할 수 없는 딸을 보면서 가슴이 타들어 갔습니다.
이어령 교수는 간증에서 내 딸이 시력을 잃게 되어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와이 한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 나의 사랑하는 달 민아에게서 빛을 거두시지 않는다면 남은 삶을 주님의 종으로 살겠나이다라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믿기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사판단으로 다시 볼 수 없다던 딸의 시력이 회복되고 정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게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함께 가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일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이게 해 달라 그는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인생과 철학을 논하며 한평생을 살았으나 73세가 되어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며 주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광명이 비추기 시작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 은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복음의 능력은 누구에게 미칩니까? 먼저는 유대인에게 해당하지만 헬라인 즉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통하여 선포하시는 말씀, 복음을 믿는 사람은 다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시고 삶의 본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그 귀한 피를 흘려 주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을 믿습니까? 복음에 아멘! 하고 사인하셨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분에게 역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셔서 모든 것을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서명을 하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면 이 시간 마음으로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저를 받아 주시고 구원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즉시 그 믿음의 사인을 확인하시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복음 안에 이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from faith to faith)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면 란 과연 무엇인가요? (디카이오쉬네)는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시편이나 이사야서를 보면 구원과 평안의 질서를 창조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활동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646절을 보면 인간의 의에 대해서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부끄러운 것, 지저분한 것, 냄새 나는 것이지요. 그런 의에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요즘 사랑제일교회와 태극기 집회 참여한 극보수 분들 자신들이 옳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신념의 자유가 있으니까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바를 들어내는 것 가지고는 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해하고 공동체를 위협하고 규범을 어긴다면 문제가 됩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계속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신천지가 살판났다고 합니다. 우린 그따위로 안 했다고요!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신천지는 원래 이단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와 일부 교인들이 보이는 행태는 참으로 답답하고, 같은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교회 관련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파장이 커지자 전 목사와 교인들은 '코로나 균을 교회에 쏟아붓는 테러를 했다'라거나 '사랑제일교회 교인들에겐 무조건 확진 판정을 한다' 등의 황당한 이야기를 퍼트리고 있습니다. 실제 교인들은 이를 그대로 믿고 검사를 회피하거나, 심지어 확진자가 격리시설에서 탈출하기도 하고 경기 포천시에서 신종 코로나 감염증 검사 대상인 교인 부부가 검체를 채취하러 온 보건소 직원을 껴안는 등 난동을 부리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는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 이름처럼 사랑을 제일로 여기고 있는데 너도 한번 감염되어 봐라 하는 게 신자로서 할 일입니까? 사랑은 도대체 어리로 간 것일까요? 요즘 기독교 혐오가 심각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드는 일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진정한 교인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죄인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의롭다, 옳다고 주장해도 결국 인간은 한계가 있고 문제가 많습니다. 칼뱅은 전적 타락(Total Loss)을 주장했습니다. 100% 죄인입니다. 이런 인간을 누가 구원하고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도 능력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32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의로워질 수 있는 길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의로워진다는 것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처럼 의로워지는 것인가요?

공동번역은 로마서 117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관계로 해석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구원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의는 여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심판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를 받아 주사 복되고 아름다운 관계, 소통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칼 바르트 박사복음이란 문이 아니라 문고리다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집에 찾아갔을 때 출입문에 문고리가 달려 있으면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것을 잡고 문을 열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잠가놓지 않았다면 문이 그저 열립니다. 문고리를 달아놓은 것은 그것을 잡고 문을 열어라 하는 약속을 해놓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냐? 우리는 하나님이 내미신 십자가의 문고리를 잡기만 하면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은혜의 문, 교제의 문, 기쁨과 감사와 소망의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 나에 대하여는 아니오를 외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말입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구리 재질의 표면에서 4시간 안에 죽으며 판지 소재에서는 최장 24시간,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강 표면에서는 2~3일까지도 생존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손잡이, 문고리 등을 만질 때는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를 받아 의롭게 됨’(稱義)을 법정 용어로 이해해 왔습니다. ‘죄를 용서받아 죄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옳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에는 아쉬운 것이 있으니 이는 정지 개념으로 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 죄 용서함을 받았다, 깨끗하게 되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에서 넘어 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16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 233절을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신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창세기 바벨탑 이야기를 보면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도 있고 다스리시는 분도 있는데 백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란에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그다음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 이는 하나님 안으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로 받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 교제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은 우리와 교제를 나누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계속 누릴 수는 관계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17절을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from faith to faith)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믿음은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믿음으로 믿음에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은 믿음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은 더 높은 차원의 믿음의 삶으로 옮겨 가야 한다라는 해석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토대, 기초는 틀림없이 믿음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칩니다. 믿음이 생략된다면 빌딩의 기초가 무너지듯 신앙생활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문장을 원어로 보면 믿음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오는 믿음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믿음에는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목표, 하나님의 의의 결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로마서 15절에 나타난 믿어 순종한다라는 말과도 자연스럽게 통합니다. 원어로 보면 믿음의 순종입니다. 바울이 말할 때는 믿음을 강조하고 순종이 없으면 그게 믿음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고 또한 순종은 하는데 믿음이 없으면 그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어디를 향하여 발전해 나가야 하는 또 다른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자신의 생애 말년에 진행된 창세기 강해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 절대로 그 자체로 혼자 있지 않고 사랑과 같은 다른 많은 은사를 동반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순종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평안함과 함께 죄가 용서되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게 되면서 점점 믿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책망을 받기도 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니까? 성전 미문에서 병자가 일어나요. 감옥에 갇혔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족쇄도 풀어 주고, 철통같은 감옥 문도 저절로 열리고, 그래서 베드로는 점점 더 깊은 신앙으로 들어갔습니다. 욥바에서 성령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도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갑니다. 이런 것을 보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주일을 안 빠지고 지킬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다 지키고 살지? 어떻게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끊고 살지? 다 부질없는 염려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발을 옮겨보는 겁니다. 그러면 준비하고 계신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믿음의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그 사람을 도우려고 성령님은 대기하고 계십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만 하면 돼요. 그래서 성령님의 힘으로 이루어져요. 이것이 믿음의 비결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진 자는 무엇으로 사나요? 17절 마지막 말씀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이는 하박국 24절 말씀으로 하박국은 악인이 득세하고 또 북방 갈대아인의 침공이 예상되는 전운이 감도를 때 활동했습니다. 하박국은 국내외로 악인들이 득세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판치는 데 하나님이 가만 보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그들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 억압받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반드시 살 것이란 뜻입니다.

믿음을 가진 의인들, 하나님으로부터 그 믿음이 인정되어 받아들여진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요? 오직 믿음으로요. 사업도 믿음으로요. 질병도 믿음으로 치료받아요. 교회 생활도 오직 믿음으로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왜요? 한번 하나님을 믿어보니 하나님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시는 성령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믿음이 흔들리고 예수 믿고 예배드리는 것이 초라해지는 이 세상이지만 오늘도 분명하게 구원의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을 믿어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20208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하나님의 진노 - 핑계할 수 없다 박승남 2020.08.30 0 771
다음글 상호소통과 빚진 자 박승남 2020.08.16 0 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