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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 - 핑계할 수 없다 박승남 202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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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18-25절 개역개정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제공: 대한성서공회

1:18~25 하나님의 진노 - 핑계할 수 없다

 

이연길 목사님께서 젊은 시절에 시골교회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마을에서 초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은 믿지 않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신, 불신자 가리지 않고 초상이나 결혼식이 있으면 찾아봅니다. 목사님이 조문하러 갔을 때 마침 입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입관하는 궁금해서 방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나이가 든 어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수의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솜을 뭉쳐서 눈을 막고 입을 막고 코를 막고 수의를 입히고 새끼로 허리가 부러지도록 묵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노인이 죽은 자의 눈을 막으면서 "누가 물어도 못 보았다고 해라", 귀를 막으면서 "누가 물어도 못 들었다고 해라"고 말했습니다. 입관을 끝낸 후에 목사님이 물어보았습니다. "조금 전에 입관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시던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 어르신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그저 내려오는 대로 했을뿐이지요."

그때 목사님이 보기에는 이 땅에서는 모른 체하고 살다가 심판대 앞에서 너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하나님께서 심문하시면 "무조건 못 들었다"고 하고 "무조건 못 보았다"라고 하면 되겠지 하는 배짱으로 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입니까? 복음을 믿는 자에게 입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 사람에게입니까? 계속해서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입니까? 아니요,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고 이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경건하지 않음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음’, ‘불 경건’, ‘신을 믿지 않음이라는 단어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모르는 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한 자들이며 부정한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있으니 종교적인 개념인 경건하지 않음에 이어 도덕적인 개념인 불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불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불의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1~4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 인간의 삶의 기본이 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5~10계명은 내 이웃 즉 사회적 생활에 관한 계명으로 인간의 삶의 근본 원리를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원리를 강조합니다.

경건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입니다. 여기 막는다라는 표현은 억누르다라는 뜻으로 거칠게 말하면 깔아뭉갠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상자 속에 넣어 그 위에 걸터앉는 것을 말합니다. 불의한 자들은 진리를 상자 속에 넣듯이 가두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진리를 깔아뭉개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 결과로 불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21~32절까지 나오는 죄들이며 이러한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의로우시므로 또한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인간들의 죄를 짓는 것을 보시고 좋아하시고 잘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초록(草綠)은 동색이다라고 말입니다. 요즘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전염병은 하나님이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시다는 우리의 신념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는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고, 의롭지 않고, 선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어려울 때도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54절을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115절을 보면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단(4:10)과 귀신들(1:25; 9:25; 4:41)을 향하여 진노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깊이 슬프게 한 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5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하십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까 생각을 했으며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가는데 마다 따라다녔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탄식하면서 노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615~16절을 보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세상에서는 내로라하던 이들도 하나님의 심판 때 어린 양의 진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 불의하고 불경건하고 진리를 막는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체하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이 천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조금만 마음을 기울여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고, 우주의 질서가 있어서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자연이 그렇고, 풀잎 하나 열매 하나가 그렇습니다. 이름 없는 곤충 하나, 바다의 생물들이 그렇습니다. 이 자연의 질서를 어기면 추수가 없고, 건축법을 어기면 집이 무너지고, 건강법을 어기면 몸에 병이 납니다. 개혁자 루터는 전염병 앞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 말하며 방역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아침에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알람을 맞춰 놓습니다. 그런데 곤충 중에는 언제 애벌레 단계에서 성체인 곤충으로 변태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명종을 가진 곤충이 있으니 바로 매미입니다. 매미의 특이한 생활은 성체인 매미가 알을 낳으면서 시작됩니다. 이 알들이 부화해 애벌레가 되는데 이들은 깨어 나오자마자 땅을 파고 들어가 굴속에서 대부분의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매미는 종에 따라 땅속에서 보내는 기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종은 13년간을 땅속에서 생활하는 반면 다른 종은 17년간을 정확히 땅속에서 생활합니다

이들은 과학자들이 아직도 밝히지 못한 시계를 가지고 있어 이 긴 기간을 정확히 측정하여 정한 해가 되면 몇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제히 땅속에서 기어 나와 나무를 타고 올라갑니다. 이들은 나무줄기에 수많은 껍질을 남겨둔 채 날개를 달고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매미 성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여 제 때에 땅에서 나와 새로운 형태의 몸으로 변하여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하는 전 과정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유전정보 속에 기록된 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질서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국에 창조과학회를 창설한 김영길 박사는 "지구만 해도 수백만 종의 동, 식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창조의 세계"를 인정치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자연이란 책에서 읽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내게 하나님을 보여다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보고 있는데, 그 그림을 열심히 뒤져 보았더니 그 속에 작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림 속에 화가가 없으니 화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옳을까요? 화가는 그림을 창조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화가는 그림 속에 거하지 않으며, 그림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전혀 화가를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 속에는 화가의 삶의 체취와 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가 만든 그림이기에, 그림 안에는 화가의 생각과 성향을 지시하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다양한 흔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전체는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눈멀고 귀먹고 말 못 하는 삼중고의 고통을 당하고 살았던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설리번(Sullivan) 이란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설리 반 선생은 헬렌에게 제일 먼저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헬렌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듣지 못하고 말 못 하고, 보지 못하는 어린 헬렌이 선생에게 보내온 반응은 그녀가 하나님을 벌써 알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란 이름을 모르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느니, 안 보이느니 하면서 믿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 즉 정죄를 받아서 현재 심판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이들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죄를 짓고 있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합니다. 18절 이하의 죄는 물론 인간이 지은 죄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 결과라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울 사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창세로부터 존재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19절에 나오는 그들 속 즉 사람들 속에 있는 양심입니다. 둘째는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까? 21. 22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14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것은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여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증거를 적절히 정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점점 어두워져서 후에는 아주 캄캄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자신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 당시 그리이스 로마 세계에서는 얼마나 각종 우상들이 넘쳐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기 한 세대 전에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몸이 없는 신이란 생각할 수 없다. 몸이 없는 신은 필연적으로 지혜가 없으며 감각이나 쾌락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이 이해하는 신의 모습들이다 이렇듯 당대의 대단한 철학자조차도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들이 자신을 신이라 하고, 황제 숭배 신전을 두어 자기를 신으로 예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생각이 허망해집니다. 허망이란 헛된, 텅 빈이란 뜻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텅 빈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원래부터 미련했는데, 이제는 더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지혜의 빛이 없다면, 생각이 텅 비어 삶의 중심은 방향을 잃고 아주 사소한 일에 시간을 탕진하며, 어둠에서 헤매게 됩니다.

여러분,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취하여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절대 발견되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섬세하게 마음을 써서 노력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분입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만 발견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허망해지고, 어두워지고, 그 빈 곳을 우상으로 채웁니다. 그 결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다 보니 인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고 하나님을 인간화시켰습니다. 빌립보서 319절 말씀처럼 자기 배를 신으로 삼고 골로새서 35절과 같이 탐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무서움 줄 모르고 인간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우상입니다. 자기 가정이 우상이고, 자기 자녀들이 우상이고, 자기 사업장이 우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고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비극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인간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살게 되니 짐승처럼 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증거가 시편 38: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38:1)"

성경 전체에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범죄한 후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엎드려 자복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2:3~5, 1~2)

그러나 범죄하고도 도리어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은 다 진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없이는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듯이, 정의의 진노가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진노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은혜와 복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불의한 자들이 영원히 평안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믿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복도 진노도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입니까?

작년에 폭염과 올해의 폭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작년에 있었던 호주의 6개월간의 산불과 지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엄청난 산불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아니 현재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19에 대하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될까요?

우리는 지금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보고 있습니다. 이기적 탐욕으로 지구 환경을 함부로 파괴하고 오염시킨 인간들에게,  죄 속에 묻혀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형벌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자연재해나 전염병과 같은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기억하고 그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상황이 닥칠 때야 신의 자리에서 본래 우리 자리인 인간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나아가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돕기를 힘써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죄인이라고 공격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합니다(19:21). 이런 욥의 요청은 현재 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요청입니다. 재앙을 당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들이라는 손가락질 대신 위로와 사랑을 전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처음은 경고하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며 그에게 진노를 내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국가적으로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나라들은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는 삽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로 세워져 가므로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으로 마칩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복속에 살고 있습니다. 때때로 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기에게 믿음을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사명까지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찬송할 뿐입니다.

믿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 위로하심이 반드시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20208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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